도브 왁스만
장정문 옮김
소우주
2024년 3월 24일
19세기 당시에는 유대인 인구 절반이 러시아에 거주했다. 1881년 알렉산드르 2세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젊은 혁명가에 의해 암살당하고 아들인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한다. 지독한 반유대주의자였던 그는 암살 배후로 유대인을 지목했고 (암살범 중 한 명만 유대인) 러시아에 거주하는 대규모 유대인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자유를 박탈당한 유대인은 박해와 빈곤까지 더해지자 러시아 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1882년 시작된 러시아와 동유럽 유대인의 집단 탈출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때 250만 명 이상이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 아르헨티나, 남아공, 호주로 이동하고 전체 3%에도 미치지 않는 7만 명만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이것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1882년에서 1942년 사이에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24,000명에서 543,000명으로 급증했는데 대부분 이민으로 인한 것이다.
이민의 주요 요인은 가난과 박해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1882~1903년 사이에 유대인 약 3만 명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1904~1914년에는 4만 명이 이주했는데, 이때 유입된 사람들은 이데올로기 성향이 강했다. 대부분 세속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고, 열렬한 시온주의자도 있었다. (벤구리온을 비롯한 이스라엘 초기 지도자 다수가 이 집단에 속해 있었다) 이민자들은 육체노동과 자립을 옹호하는 시온주의에 영감을 받아 키부츠를 세우고 새로운 도심인 텔아비브를 건설했다.
시온주의는 세속적, 종교적 신념을 모두 아우르며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포함한다. 이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신념 체계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사실 홀로코스트로 인해 시온주의의 필요성을 느끼기 전까지는 유대인 대부분은 시온주의를 반대했다.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도 다르지 않았는데, 민주국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시온주의를 표방하면 자신들이 살고 있는 국가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으로 인식되어 박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모여 살면 소수 민족으로 살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런 그들에게 그 땅에 다른 민족이 산다는 사실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국가로 만들어야 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논쟁을 계속했다. 이런 논쟁은 제2차 세계대전 도중에 종결되어 유대인 공동체가 유대국가 수립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1897년 시온주의 조직을 설립한 테오도르 헤르츨을 비롯한 정치적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이 국가라는 형태 안에서 정치적 자결권을 갖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것이 유럽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맞설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이라고 생각했다.
1948년 이후 이스라엘과 유대인 디아스포라 모두 시온주의의 의미를 ‘이스라엘이 유대국가로 존속하는 것’으로 바꿨다. 한때 세속적인 이데올로기 운동이었던 시온주의는 점차 종교적 색채를 띄게 되었다. 초기 시온주의자들은 유대교 전통과 용어와 상징을 차용하면서도 생활 방식은 철저하게 세속적이었고, 유대교 교리도 무시했다. 최근 수십 년 동안은 이스라엘과 독실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주의를 열정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은 친시온주의 정서보다는 자국의 지중해 동부지역 전략적 이해관계, 즉 인도로 향하는 수로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19세기 말 개통된 수에즈 운하는 대영제국의 중추적 교통망이 되었고, 따라서 이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했다.
영국 정부가 제1차 세계대전 도중에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벨푸어 선언’을 발표한 것은 세계 유대인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미국 및 러시아와 맺은 전시 동맹을 강화하고 적국인 독일을 약화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이는 유대인과 시온주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당시 유대인 대부분은 시온주의자가 아니었다) 유대인의 힘을 과대 해석한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을 위임 통치해 오던 영국은 아랍 반란으로 팔레스타인 통치가 어려워지자 1937년 팔레스타인을 아랍국가와 훨씬 작은 유대국가로 분할하되 일부 전략 지역은 영국 통제 아래 두는 것을 제안했다. 2년 후인 1939년 독일과 전쟁이 임박하자 영국은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을 철회하고 대신 10년간 과도기를 거친 후 아랍인이 다수인 단일 국가를 제안하는 백서를 발표했다. 이는 벨푸어 선언을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의 배신에 치를 떨었다. 사실 백서는 아랍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전쟁을 앞둔 영국은 아랍 석유가 필요했고 아랍국가들이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지 않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랍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백서를 제안했던 영국은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 난민이나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서 탈출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유입되는 걸 막았다. 심지어 전쟁이 끝나자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이스라엘이 탄생했다고 생각하지만 홀로코스트가 없었더라도 유대국가는 출현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수십 년 전부터 헤르츨을 비롯한 정치적 시온주의자들은 유대국가 건설을 주창했고, 시온주의 운동은 수년 동안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인프라를 구축해 왔다. 홀로코스트가 유대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그 실현을 앞당긴 것은 사실이지만 홀로코스트 때문에 시온주의자들이 유대국가 건설의 실존적 당위성을 확신한 것은 아니다.
영국과 소련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세우는 것을 홀로코스트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라 현실 정치로 접근했다. 영국은 산유국인 아랍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유대국가 설립에 반대했다. 반면 소련은 당시 유대국가 설립을 주도하던 사회주의 성향의 마피아당이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을 몰아내고 소련과 좋은 관계 맺기를 바랐기 때문에 유대국가를 지지했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에 대한 동정심이 세계적으로 퍼져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동정심은 일시적이었고 유대국가 건설에 대한 대중의 지지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결국 홀로코스트는 일부 서방 국가에서 이스라엘 존재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긴 했어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이스라엘 건국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 유대인 사회의 문화와 집단적 정체성,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의 정신을 형성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문제를 이어받은 유엔은 이 문제를 조사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11개국 대표로 구성된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SCOP)를 구성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을 순회하며 증거를 수집하고 청문회를 개최하고 유대인 난민 수용소를 방문했다.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의 의견만 듣고 팔레스타인 대표의 의견을 듣지는 못했는데, 이는 팔레스타인 아랍 지도자들이 위원회를 보이콧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