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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22. 2024

궁핍한 날의 벗

<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19

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열아홉 번째 서평이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안대회 선생께서 옮기신 박제가의 <궁핍한 날의 벗>을 읽었습니다.


링크는 아래에 올립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클릭 한 번...


♣♣♣


궁핍한 날의 벗

박제가

안대회 옮김

태학사

2000년  5월 12일 초판

2022년 10월 14일 개정판


우리 고전문학을 읽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원저보다는 옮긴이를 보고 고르는 편이다. 그동안 읽어본 바로는 한양대 정민 교수와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가 옮긴 책이라면 원저가 무엇이든 지적 호기심과 읽는 즐거움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들의 작품을 고르는 안목과 작품을 풀어낸 솜씨가 신뢰할만하다는 말이다. 언제부턴가 <궁핍한 날의 벗>이라는 이 책의 제목이 낯설지 않았다. 올해 읽을 책을 챙기는 중에 이 책이 생각나 찾아보니 안대회 교수가 박제가의 산문 51편을 고르고 옮기고 거기에 해제를 더한 것으로, 출간되고 채 두 해가 지나지 않았다. 책 읽기를 마치고 내용을 정리하는데 2022년은 개정판이 나온 때이고 초판은 2000년에 출간되어 무려 9쇄를 거듭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 책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개정판 나오기 이전부터였던 모양이다.


천하에서 가장 친밀한 벗이라면 곤궁할 때 사귄 벗을 말한다고 하니 <궁핍한 날의 벗>이라는 제목으로 볼 때 살기가 나아진 훗날에 곤궁할 때 사귄 벗과 음풍영월(吟風詠月)을 함께 노래하는, 조금은 한가한 책이 아닌가 짐작했다. 실제로 박제가가 교류하던 벗에 대한 인물평과 그들과 주고받은 서신, 제문과 행장, 그리고 예술론과 문학론이 책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자인 박제가가 “박지원 선생의 문장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에 사는 선생을 찾아뵈었다”거나 “이덕무 유득공과 노닐었다”는 회고를 통해 그들이 동시대의 인물이며 당시 이미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당시의 시대상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유배지에 있는 벗에게 편지를 보내며 “먼 변방까지 가는 인편이 드물어 자주 소식을 전하지 못한다”고 미안해하고, 자신이 유배지에서 맏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관아에서 죄가 무겁다 하여 외부인과 오도 가도 못하게 한다”고 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 편지를 전하는 방법이나 유배지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덕분에 당시 선비의 생활상을 그린 <조선시대 양반과 선비>라는 책이 최근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제가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할 때 과로로 인해 시력이 떨어져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며 상관에게 면직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안대회는 해제에서 당시 검서관은 책을 교정하거나 국왕 관련 문서를 필사하는 업무가 과중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안경을 보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로써 당시 관료의 생활상 일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정조가 검서관들에게 두보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를 그림으로 그린 음중팔선도(飮中八仙圖)의 서문을 지어 올리라고 지시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박제가는 평소 생각하던 미학을 바탕으로 서문을 지어 올려 차석을 차지함으로써 자신의 그림 보는 안목을 입증했다. 그는 평소에 “글씨와 그림을 내버려 둔 채 입에 담지 않는 것은 선비로서 옳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한 사람이었다. 안대회는 그가 약관의 나이에 남긴 장문의 <묘향산 기행>을 주저 없이 ‘조선 후기 유가 문학의 백미’로 꼽는다. 그는 또한 친구 유득공이 ‘통일신라와 발해가 대치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해석해 발해를 우리 역사로 확실하게 편입’시킨 <발해고>를 썼을 때 그만의 시각으로 발해와 요동의 역사를 해석한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설명을 하나씩 읽어가면서 선비는 관료이기보다는 종합 문화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생각은 그들의 문화적 소양이 존중받을만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라기보다는 국정을 이끌어가야 할 관료가 업무 능력이 아닌 문화적 소양으로 평가받는 풍조에 대한 비판에 가까운 아쉬움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마지막 한 장을 읽으며 일거에 반전되었다. 그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낸 <북학의>의 서문, 그리고 정조가 계속되는 가뭄으로 농업 생산력이 떨어지는 문제에 대한 개선방안을 요구했을 때 <북학의>의 농업 관련 부분을 간추려 제출한 글을 보면서 비로소 북학파의 거두인 실학자로서 박제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북학의>의 서문에서 청나라의 풍속 가운데서 조선의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할만한 것이 있으면 발견하는 대로 기록했다고 술회한다. 당시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시선을 감안한다면 위험천만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시종일관 필요한 풍속을 받아들여 얻을 수 있는 유익과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감내해야 하는 폐단까지 가감 없이 서술한다. 이처럼 무모하리만큼 저돌적인 주장은 병이 무엇인지 알면 처방은 손쉽게 찾을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각종 폐단의 근원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이제 농업을 장려하고자 하면 반드시 농업에 해를 끼치는 것을 먼저 제거하고 그다음 다른 조치를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선비를 도태시키는 일입니다. 소과와 대과에 응시하는 자가 십만을 헤아리고, 선비랍시고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자와 그에 그치지 않고 농민을 머슴으로 부리는 자들이 수도 없는데, 이들이야말로 심각하게 농사를 망치는 존재입니다. 둘째, 수레를 통행시키는 일입니다. 농사는 비유하자면 물과 곡식이고 수레는 비유하자면 혈맥입니다. 혈맥이 통하지 않으면 살지고 윤기가 흐를 도리가 없습니다.”


도움은커녕 걸림돌만 되는 선비를 걸러내야 한다는 과감한 주장과 물류의 중요성을 설파한 그의 혜안이 바로 그를 북학파의 거두요 조선 후기 대표 실학자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동력이 아닌가 한다. 이어서 그는 풍속을 갑자기 바꾸자고 했을 때 백성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먼저 청나라에서 기구를 들여와 대장간을 만들어 농기구를 보급할 뿐 아니라 농기구 제작 방법을 확산시키고, 새로운 농사법을 시험할 수 있는 시험 경작지를 마련해 결과를 비교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농사법의 효과가 입증되면 훈련된 농사꾼을 파견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이 방식을 채택하면 그에 투입되는 비용은 불과 몇 년 안에 충분히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또한 국가의 가장 큰 폐단은 가난이라며 청나라와 통상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청나라의 건축, 광산, 관개, 조선, 벌목, 운반 기술자를 초청해 선진 기술을 습득하고 우수 인재를 양성해 각지에 파견할 것을 주장한다. 이처럼 십 년만 계속한다면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하고 생활 수준을 개선하고 관리들의 녹봉을 인상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러고 나면 경복궁도 다시 지을 수 있고, 경회루도 새로 지을 수 있으며, 의정부와 육조도 예전 규모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함께 밝힌다.


그는 <북학의>에서 뿐 아니라 그의 글 곳곳에서 기술자를 천대하는 풍조를 개탄한다. 수레 기술자인 이길대가 자기 재주를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다가 이조참의가 수레 기술자 천거를 요청하자 그를 보내지만, 정작 그를 만난 이조참의가 이길대를 천민으로 여기고 대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개해 기술자를 다시 천거해달라는 부탁을 단칼에 거절한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비들을 놀고먹는 좀벌레라며 이들을 내쳐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에는 서자로서 제대로 뜻을 펴보지 못한 자기 처지에 대한 불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 그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개혁으로 먼저 급한 불을 끄고 나서 경복궁이던 경회루건 지을 수 있다는 주장도 지배층에게 자칫 비아냥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겠다.


안대회는 그가 본래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이었다고 강조한다. 이십 대까지만 해도 위트와 기지가 넘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맞닥뜨려 사회의 모순을 체험하고 나서 부조리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실학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할 기술 도입과 사회 개혁을 격정적으로 토로한 것이다. 하지만 안대회는 그가 꿈꿨던 것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의식개혁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개혁뿐 아니라 그의 사상과 문학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에서 출발한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는 외형적으로는 서자 출신의 하급 관료에 지나지 않았고, 그래서 시대를 앞선 그의 혜안은 결국 정책으로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박제가는 이런 좌절로 인해 말년을 불우하게 보내야 했다.


책을 덮으면서 갑자기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동년배였던 정조가 그의 능력을 알아보았음에도 그의 개혁 정책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정조야말로 조선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개혁 군주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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