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 주인이 된다는 것은 내 인생을 직접적, 배타적, 전면적으로 지배하여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권리를 말한다. 그런데 사람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몸, 시간, 돈에 대한 직접적, 배타적, 전면적 권리가 달라지게 된다. 배우자와 좋은 시간을 보내야 하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하고, 명절에 부모님께 용돈을 보내 드리며 살아야 한다.
주식회사의 주주들이 이익배당금을 챙겨가 듯, 나의 시간과 힘든 노동으로 번 돈을 나의 가족인 자식, 배우자, 부모에게 나누어지게 된다. 내가 나누어준 시간과 금액을 살펴보면, '나'라는 존재의 대주주와 소주주의 구성 상태가 명확해질 것이다. 나의 주주 구성을 알아채는 순간, 내 인생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절대적인 대주주일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가족이 대주주 일 것이다. 이렇게 직장 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각자의 주주(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땀 흘리며 배당금(월급)을 지급하며 생계를 꾸려 나간다. 그런데 이런 노력에도 주주와의 관계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컨설팅 회사에 근무를 하던 때, 고객사에서 늦은 시간까지 업무를 마치고 고객사의 부장님과 함께 지친 몸을 이끌고 종로거리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가벼운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밤이 깊어져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일어나는데, 그 부장님은 한사코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지갑을 열었다. 그 지갑에는 7살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가 예쁜 드레스를 입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부장님, 따님이 좀 어려 보이네요"라고 말하자,
"아, 우리 딸은 올해 고3이야, 고3! 얼굴도 보기 힘들지."
"그런데, 왜 옛날 사진을 가지고 계세요?"
"어.. 자네도 아이를 키워봐. 딸이 10살을 넘어가면 아빠와 이야기를 하지 않아. 나에게 딸의 기억은 이때에 멈춰 있는 것 같네그려"
회사의 치열한 경쟁에서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 평일 야근의 강행군은 기본이며, 주말 근무도 빈번했으리라. 모처럼 쉬는 주말은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에도 넉넉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삶에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버거웠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아버지와 멀어지게 되고, 이런 외로운 아버지들은 은퇴를 하고서도 계속 쓸쓸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일을 했던 것일까?
돌이켜보니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밤늦게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는 나의 일상은 정상이 아니었다. 나에게 집이라는 곳은 그저 회사를 다니기 위해 옷 갈아입고, 잠자는 곳이었다. 술자리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은퇴를 할 무렵, 나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내 한평생을 희생하며 살아왔다고 말하겠지만, 정작 가족들은 누가 그렇게 돈 벌어 오라고 시켰냐고 반문할 것 같았다. 한쪽으로 치우친 삶은 반드시 후회를 남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직을 준비를 시작하였고, 몇 달 후에 컨설팅을 떠나 In-house 인사팀으로 들어갔다.
지금 나의 주주들은 배당금뿐만이 아니라 나의 시간과 관심도 요구한다. 매우 까다로운 주주들이지만, 그들이 있어 내가 일하고 살아가는 원동력이 아닐까 한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집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