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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한다는 건, 기쁨이고 축복이다.

새는 날개가 있고 물고기는 지느러미가 있듯 인간에게는‘언어’가 있다.

" 처제, 지금 언니가 진통이 심해서 다시 서울로 가고 있어. 애가 나올 것 같아!
  장모님, 장인어른께 대신 말씀 좀 전해드릴래?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어."


추석 연휴 기간에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 먼저 와 있던 중 형부로부터 다급한 전화 연락을 받았다. 

임신 중이었던 큰 언니가 형부와 차를 타고 고향으로 오던 길에 

갑자기 진통이 심해져 병원으로 차를 돌린 것이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 가족들도 서둘러 짐을 챙겨 언니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그날 긴 시간 진통 끝에 언니는 출산했고 나는 세상의 빛을 본 첫 조카를 만났다. 

신생아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갓 태어난 조카의 모습은 너무나 신기하고 예뻤다. 

팔 한 뼘도 안 될 만큼 아주 작아서 안으며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첫 조카는 나에게 작고 아담한 체구에 조용히 쌔근쌔근 잠을 자는 천사 같은 이미지였다.



언니가 병원에서 몸조리를 하고 퇴원을 한 뒤에는 종종 조카를 보러 언니네 집으로 갔다. 

그제서야 나도 말로만 듣던 육아의 현실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언니는 본능에 충실해 24시간 먹고 싸고 자는 것이 무한 반복인 아기를 돌보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없이 예쁘고 얌전했던 조카의 모습은 어디 갔을까? 



온종일 울고 찡찡대고 온몸으로 투쟁을 부리는 모습에 나까지 진이 빠질 정도였다. 

그 뒤로도 지인이나 친구들이 아기를 낳고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는 날개가 있고 물고기는 지느러미가 있듯 인간에게는 ‘언어’가 있다. 

동물과 구분 짓는 인간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언어이다. 

동물은 소리나 몸짓으로만 의사소통을 하는 반면 

인간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말과 글로 표현하고 전달한다. 


소리와 몸짓으로도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언어’만큼 내 의사 표현을 정확히 할 수 있는 도구가 또 있을까?


신생아를 돌보는 일이 쉽지 않은 건 체력적인 소모가 크다는 이유도 있지만 

아직 말을 하지 못해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아기가 말을 떼기 전까지는 이렇게 의사소통이 힘들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울고 보챌 때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배가 고픈 건지, 졸린 건지, 아니면 너무 춥거나 더워서 그런 건지, 기저귀가 젖어서 그런 건지.. 

아이도, 엄마도 모두 답답할 노릇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엄마는 점점 아이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게 되지만 

아이 입장에서보면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입으로 말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만약 같은 상황에서 “엄마, 나 배고파! 먹을 것 좀 줘.” “아빠 나 졸려~ 지금 잘래.”라고 말한다면 서로 얼마나 편할까? 그래서 말 못하던 아이가 옹알이를 하고 한두 마디씩 입을 떼기 시작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는 것이다. “엄마”, “아빠”를 처음으로 부르는 순간은 그야말로 감격 그 자체다. 


정확지도 않은 발음으로 말을 했을 뿐인데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어 

아이 앞에서 수없이 “엄마~ 엄마~, 엄마 해봐~”를 외친다.     


이처럼 ‘말’은 내 의사 표현을 가장 속 시원하고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도구이자 

언어 이상의 상호교감을 나누는 수단이다. 


말을 한다는 것, 그리고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말에 감동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축복인가.


하지만 신생아 시기를 거치면 이제 말을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말하는 기쁨과 소중함을 잊은 채 살아간다. 나 역시 그때는 말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내가 아나운서로 일을 하면서 농아인들의 축제인 수화경연대회 사회를 맡았던 것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말의 가치에 대해 크게 느꼈던 계기가 되었다.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수화경연대회인데 참가자들이 각자 준비한 노래에 맞추어 수화로 공연을 펼쳤다. 나는 한 팀 한 팀을 소개하고 공연이 끝날 때마다 짧게 소감을 말하며 진심으로 참가자들을 칭찬하고 격려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연습하고 준비한 참가자들에게 큰 박수를 보냈고 나에게는 모든 무대가 최고이고 감동이었다. 



농아인들은 청각장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말을 배우지 못하고 입으로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소 자신들의 1차 언어인 수화(수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무대에서 멋진 공연을 펼쳤지만, 

건청인인 우리는 우리의 1차 언어인 말로 의사소통을 보다 편하게 하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더욱 감사했다. 

그리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말의 소중함에 무감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그동안 어떤 말들을 해 왔지?’ 한참을 생각해봤다.


내 의견만 고집했던 이기적인 말들, 상대를 배려하지 못한 차가운 말들, 내 자존심에 상대에게 상처주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분명 더 좋은 말과 따뜻한 말, 긍정적인 말이 많은데 나는 그런 말을‘하지 않았던 것’이다. 

농아인들처럼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오히려 그들은 입으로 말을 하지 못할 뿐 수화로 아름다운 말과 노래 가사를 전해주었다.     


말을 한다는 것은 기쁨이자 축복이며, 내 말이 누군가에게 기쁨이고 축복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아마 그때부터 한 것 같다. 요즘은 가족 간에도 서로 바쁘다 보니 얼굴 보며 대화할 시간이 없고 또 인터넷과 디지털 문화의 발달로 주로 문자나 SNS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점점 더 대면 의사소통은 줄고 온라인상에서 오해와 갈등을 겪으며 일과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말’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더 자주, 더 좋은 말을 나누는 아름다운 사회를 꿈꾼다. 

그렇게 된다면 더불어 소통하는 세상, 따뜻하고 가치 있는 세상이 올 거라 믿는다.     


오늘부터 한 가지만 기억하자. 

‘당신의 말은 누군가에게 기쁨이고 축복이 되는가?’    




1) 농아(聾啞, deaf mutism)는 소리를 듣지 못하여 언어가 발달하지 못한 즉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며, 농아인(聾啞人)은 대부분 선천적 혹은 말을 배우기 전인 영유아기에 청각장애가 있어 말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2) 건청인(健聽人) 청각장애인에 상대하여, 청력의 소실이 거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출간도서】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1379428&sta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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