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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teOE Aug 14. 2021

느끼하지 않은 그릭요거트를 찾아요

비 생산적인 토요일 오후를 지나는 중

따지고 보면 1년째다. 1년 전부터 시작된 긴장이 오늘에서야 풀린 것 같다. 어어, 내 인생이 여기로 이렇게 흘러가는 게 맞나, 하며 얼떨떨하게 도착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무한 버티기, 무한 긴장, 오해와 억측과 뜬구름 같은 소문과 억울함 속에서 인격과 소양을 지키는 일. 그게 오늘에서야 좀 해방이 됐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극심한 뻑뻑함이 느껴진다. 전날 온 신경을 잔업에 쏟아붓고 다시금 충혈된 눈을 억지로 감고 잠을 청했던 탓이다. 이럴 땐 재빨리 인공눈물을 찾아 폭포수처럼 쏟아붓고 한숨 더 자면 괜찮아진다. 그래서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뜨니 꽤나 긴 몽롱함 속에 귀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나는 휴대폰을 신경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절대 오늘만큼은 일하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으로 천장을 본다. 한 3초간 그러다 이내 일어나 노트북 앞에 번개같이 착석해 어제 마무리했던 일들의 흔적을 복기한다. 작은 실수 때문에 여태까지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 순 없다. 


한 시간쯤 지나니 건너편에서 작은 소음이 들린다. 동생이 일어난 것 같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아침을 먹기 전엔 꼭 챙겨 먹곤 하는 식도염 약을 찾아 입에 넣고, 다 녹아버리기 전에 물을 따르러 정수기 앞으로 향한다. 중간에 마주친 동생과 무심하지만 귀찮지는 않은 정도의 손인사를 건네고 물 한 모금을 꿀꺽 삼킨다.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일에 의연하지 못하냐. 란 말이 귀에 계속 맴돈다.


그것은 기폭제였다. 약 이틀 전 아주 바쁘게 일하고 있던 내게 들려온 말 하나가 그랬다. 다분히 업무적 영역이라 어떻게 설명해도 100% 와닿게 설명할 재주가 없으니 포기하고, 요약하자면 사실 별건 아니었다. 바빠서 죽겠다, 싶은 상황에 계속해서 커다란 태클이 하나씩 들어오는 듯한, 그 통제 불가능한 무력감이 나를 덮치는 순간이랄까. 뭐 대략 그쯤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구나, 했다. 그렇구나가 되어야 한다고 머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머리와 급격히 분리되어 저 멀리 어디 다른 세상에라도 가버리는 것 같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남아있는 것으로 일을 했다. 마음은 간 데 없고, 움직이는 건 머리뿐이니 그 한쪽의 날개에 불을 붙여 전력을 다해 시간을 보내고 온 것이다.


어젯밤은 딱 숨통이 막혔다. 비전과 목표를 잃은 기분이었다. 어딘가 가버린 마음도 되찾아 와야 했고, 과열된 머리는 식혀야 했다. 집에 돌아와 내 꼴을 보니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물 한 모금을 마저 삼켰다. 이 약은 삼킨 뒤 30분부터 1시간 정도 사이에 식사를 해주면 된다. 그 이상이 넘어가면 메스꺼워 참을 수가 없다. 약 1시간 뒤에 내가 먹을 밥은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며 냉장고를 열고 이것저것 밑반찬을 헤집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밥을 먹고 있었다. 유독 계란 프라이 만드는 작업을 귀찮아해서 항상 통후추를 잔뜩 뿌려 대충 만드는 스크램블 에그와 백김치, 오징어채 볶음, 그리고 김과 흰쌀밥이 메뉴의 전부였다. 천천히 씹어 삼키며 어제도 찾아오지 못한 내 마음을 다시 가늠해본다. 중요한 것은 연료일까 아니면 내비게이션일까. 나는 왜 길을 잃은 거지.


밥을 다 먹고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이 찍어 올리는 브이로그를 봤다. 화면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음료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집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입고 나갈 옷을 세팅해두고 카페에 갈 준비를 한다. 노트북은 꼭 얌전히 두고, 이번엔 읽을 책을 가져가야지! 하며 책장을 살펴보다 문득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이따 나가? 밥은?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 갑자기 이야기가 재미있어 30분 정도 둘 다 서서 수다를 떨었다. 이런 적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데 신기하네, 하며 다시 방으로 돌아왔는데 문득 나가기 싫어진다. 동생과 대화를 하고 나니 마취가 풀린 듯 피로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래, 사실 나는 좀 쉬고 싶었다.


동생이 나가고 아무도 없는 텅 빈 집 안을 둘러보다 최근에 배운 필라테스 스트레칭 동작을 복습해보기 시작했다. 한참 몸을 움직이니 갑자기 어딘가 입이 심심하다. 장보기 어플을 켜서 대뜸 그릭요거트와 우유를 주문했다. 금방 도착한 요거트는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 있지? 갑자기 요거트라는 단어에 꽂혀버린 나는 급기야 다른 느낌의 요거트를 또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에 배달 어플을 켠다. 동네 근처에서 수제 요거트를 만든다는 카페를 발견했다. 대용량 그릭요거트에 이것저것 토핑을 추가해 주문을 한다.


느끼했다. 한입 뜨는 순간 미세한 기름 맛이 느껴지며 텁텁하게 끝나는 마무리가 아주 실망스럽다. 아까 주문했던 시판용 요거트에서 그만 멈췄어야 했다. 맛있다고 느꼈을 때 그만 좋은 추억으로 남기고 다른 메뉴를 찾아갔어야 했는데. 차라리 커피를 시키던지. 요거트는 무슨 또 요거트야. 돈은 돈대로 쓰고 받은 것이 고작 이 정도 맛이라니.


나는 문득 이것이 나의 욕심 어린 성격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고작 요거트 하나 때문에 내 인생 전체를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은 우습고, 이것 역시 일종의 기폭제다. 그래. 나는 희망과 욕심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지 못한 벌을 온갖 시행착오로 받아내는 중이다. 


좀 덜 복잡하게 인생을 끌고 갈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를 나는 모두 거절했다. 내 눈으로 보기에 그것이 전혀 빛나지 않는 방법인데 그걸 다 알면서도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내 벌을 받고 있다. 벌이라고 표현하니 내 삶의 선택들이 모두 다 잘못인 것 같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결과가 없는 과정은 잘못인가?


충동적으로 시킨 공산품 요거트가 아주 맛있고, 고심해서 고른 수제 요거트가 느끼했던 하루였다.

다음 주문을 위한 초석이 될 수도 있었던 거지, 뭐. 그냥 그 뿐.


오늘만큼은 잉여로운 하루를 보내도 스스로를 다그치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제에 벌써 오후 5시를 맞고 있다.


크게 나아진 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잘못된 것 같지도 않다.


저녁은 뭘 먹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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