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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Jan 17. 2022

책읽기의 생생한 체험

이반 일리치를 읽으며


제대로 이반 일리치의 저서를 읽은 것은 처음이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와 같은 작품에 대해 벌써부터 궁금했지만 바쁘고 읽을 책이 많다는 핑계로 시작하지 못하다가 함께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공동체에서 일리치 전작 읽기가 마무리되어 간다고 해서 부랴부랴 막차에 탑승해 읽은 책이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였다. 이 책은 후기 일리치의 사상을 잘 담고 있다고 했다. 이반 일리치가 배리 샌더스와 함께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토대로 쓰였다.


책에는 문자와 언어의 역사가 담겨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고 있는 언어의 역사는 언어가 처음부터 하나였다고 생각하거나 문자가 태초부터 있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문자의 세계에 살고 있기에 문자가 없던 구술문화의 시대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일리치는 현대의 우리를 '책의 산물'이라고 표현했다. 일리치는 우리가 자신을 글월이 켜켜이 쌓인 케이크처럼 바라본다고 했다. 자신을 인증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 기록은 기억을 위해 필요했고 문자가 없던 시절에는 창고에 넣어둔 자료를 꺼내오는 기억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오직 사람들의 회상이나 명상에 의해 이어져 내려오던 노래와 서사시는 문자로 기록하고 기억하면서 구술문화시대의 넓고 커다란 어떤 '침묵'의 세계를 잃어버렸다.


켜켜이 쌓인 글월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인증하기 위해 무엇을 한다는 글을 읽고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인증하기 위해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린다. 나도 처음 인스타그램을 시작할 때 팔로워보다는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기록한다는 차원으로 생각했다. 그게 바로 자료를 켜켜이 쌓아 올려 나를 증명하려는 방식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는 시대. 누군가의 회상 속에 이어져 내려갈 수 없는 시대. 쌓아 놓은 것이 부서지면 자신도 부서져 버리는 시대. 글월로 자신을 증명해내야만 하는 시대, 문자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게다가 이제는 문자나 이미지보다 컴퓨터의 언어로 표현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그것들은 문자를 모르면 읽지 못하는 소외를 불러일으켰듯 컴퓨터의 언어를 모르거나 조작할 수 없으면 소외되는 현상을 불러온다.


이반 일리치의 글은 분명 읽고 있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경우가 많다. 일리치는 자신이 만든 단어를 사용하거나 이미 있던 낱말을 새로운 뜻으로 정의해 사용하는 일도 많다고 했다. 그것이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하나의 장벽이 되기도 한다. 내가 알고 있던 것들로 해석하려면 갸우뚱할 때도 있는데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해도 내가 알던 개념까지도 이게 맞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 특히 책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아메바 낱말이라거나 새말(Newspeak), 꽥꽥일률(Uniquack)같은 말은 너무 낯설어서 힘들었다. 무엇이든 정확하게 개념 정리가 되어야 정보로써 처리해 넣는 방식에 익숙해진 나머지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넘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었다. 카프카의 글에 나온 '오드라데크'가 무슨 뜻인지 몰라 네이버에서 검색했던 것처럼. 작품에서 만들어진, 존재하지 않는 단어인데 실제 존재하는 단어로 생각하고 찾아보았다. 앞뒤 맥락을 읽지 못해서다. 게다가 이제는 손안에 사전을 하나씩 들고 다니는 모양새다 보니 이해하려 하거나 머릿속을 뒤져 찾아내는 것보다 스마트폰에서 찾는 것이 빠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꽥꽥일률도 사전 검색해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책에서 꽥꽥일률은 UniVAC이라는 최초의 시판용 컴퓨터가 나온 뒤에 그에 빗대어 만든 단어라고 했다. 그것을 가져다 사용한 일리치는 어떤 뜻으로 이 단어를 쓰려고 한 걸까. 어떤 내용을 설명하고자 쓴 단어인데 나는 그 단어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채로 거기에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새말과 이란성쌍둥이라는데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그 구덩이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아메바 낱말은 그 정확한 뜻은 모르고 다른 여러 단어와 붙여 사용하는 낱말이다. 예를 들어 에너지라는 낱말이 있는데 원래의 뜻보다는 과학적으로 추상화되어 애매모호한 뜻으로 대체에너지, 에너지 필요 등으로 다른 단어에 붙여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런 어휘로 만들어진 단어를 꽥꽥일률이라고 한다. Uni에 오리 울음소리 Quack를 붙인 말인데 우리말로 옮기다 보니 꽥꽥일률이 된 것이다.


새로운 단어를 번역할 때 어떤 규칙을 적용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누가 정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단어에서 천편일률을 떠올려 반대의 이미지로 이해하려 했다.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했다. 그러한 번역에 대한 이야기도 책에는 나와있다. 하나의 언어가 있고 또 다른 언어로 그것을 번역한다는 것은 최초의 누군가가 그것을 지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최초의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거나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아니면 창조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거나. 고대에서 '거짓'이라는 것은 진실의 반대가 아니라 속이려는 의도가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의 개념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튼, 번역이라는 것은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니 애초에 정확한 번역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때 떠오른 생각은 우리들이 어떤 것을 체화하고 다시 하는 말이나 글은 모두 번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글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해 어떤 말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내 언어로 바꿔 말하는 것이니까.


후기에서는 우리와 침묵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 '우정의 침묵이다.'에서 나는 다시 걸려 넘어졌다. 우정의 침묵이다라는 것은 우정이 침묵이라는 것일까 우정이 침묵한다는 것일까. 내가 알고 있던 은유법부터 다시 점검해 보았다. 일리치의 책 읽기가 어렵다고 하더니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넘어졌다. 이 책이 유독 어렵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읽으면서 나는 얼마나 문자 문화에 갇혀있으며 생각은 고착화되었는가를 절실히 느끼면서도 전혀 적응할 수 없었다. 우정에 대한 정의는 맨 앞의 서신을 보라는 주에 따라 빅토르의 위고가 쓴 서신으로 돌아갔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에서부터 다시 우정의 정의로, 그것과 침묵의 관계로. 돌고 돌아도 내가 아는 어떤 것으로도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나도 역시 내 말로 번역을, 쉽게 말해 억지를 부려보고자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정이 침묵하는 것인가, 우정이 침묵이란 말인가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대로 적어 두었던 메모를 그러모아 쌓아 두고 최대한 기승전결을 맞춰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책 제목이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였다.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돼? 민중은 뭐고 마음은 뭔데? 문자가 민중의 마음이 되는 게 아니었나? 다시 처음부터 뒤죽박죽이 되었다. 써뒀던 메모들은 모두 우정이나 침묵, 우리에 관한 것이었는데 제목을 보고 다시 글을 쓰려니 마음에 관한 생각만 자꾸 떠올랐다. 그 모든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글을 쓰기 시작하니 방향을 잃었다. 카프카가 글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손이 알아서 쓰는 것이라 했다더니. 내 글은 정말 머리와 상관없이 손이 쓰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중간에 길을 잃었지만 다시 찾아들어가기 어려워 마음을 놓아버리고 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 글을 세미나에서 내 목소리로 낭독하는 동안 나는 다시 자의식에 휩싸여 얼굴이 화끈거리고 목소리가 떨렸다. 내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글을 마무리했다는 후회, 나는 왜 더 많은 것을 파고 들어가지 못했나 하는 좌절,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에 집착하는 습관, 다른 사람의 글이 기준이라 여기고 내 글을 깎아내리는 평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는 일리치를 읽고서 쓴 글에서도 나는 나를 평가하고 분석한다. 내가 쌓아 올린 글월이 나라고 믿으며 그 밑바닥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한다. 글월(text)로써만 증명되는 자기(self)를 나 스스로 충실히 보여주는 책 읽기의 생생한 체험이었다.





일리치는 네가 생각하는 책읽기의 넘어짐은 무엇이냐고 물을 것 같다. 그는 남들이 아는 것을 왜 모르느냐고 묻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 커다란 '침묵' 속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몇 개의 단어를 통해 이해하려고 하니 답답할 것이라고, 우리가 가진 문자로 나타낼 수 있는 세계는 침묵에 비하면 너무나 비좁다고 하는 것 같다. 하나의 단어와 단순화된 개념에 집착하지 말고 글월에 숨겨진 맥락과 역사를 보라고, 친절하게 말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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