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앙장구 Aug 15. 2024

"니가 뭐 잘못했는데? 그놈이 나쁘지."

원칙에 따라 당당하게 살아라. - 친구의 인생 조언

금요일 오후 퇴근하는 전철에서 전화로 해고통지를 받았다. "니. 월요일부터 출근하지마라. 남은 1년치 급여는 지불해줄께." 친구가 설립한 금융소프트웨어 개발 벤처회사에 부사장으로 합류한지 5개월 정도 된 시점이었다. 무엇이 잘 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친구는 대학교수를 겸임하고 나는 연구소를 퇴사하고 부사장으로 COO겸 CFO역할을 하고 있었다. 주역할은 CFO쪽이었다. 친구와 낮이면 유망 투자자들을 만나러 하루에도 여러 곳을 방문하고, 저녁이면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맥주잔을 맞대고 사업의 비전과 향후 전략에 대하여 토론하고 지혜를 모았다. 유력한 전략적 제휴사로부터 투자의향도 접수되어 조건을 협의할 단계였다.

무엇이 잘못되었지? 보다는 "내가 뭘 잘 못했지?"라는 자책감이 이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나는 절박했고, 나약하고, 소심했다. 평생 공부하고 연구만 하다가, 미국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으나, 그 시점은 MF사태가 정점을  막 넘긴 1998이었다. 귀국하여 살펴보니 유학갈때 기대했던 교수자리는 가능성이 없었다. 유학을 워낙 늦게가서 귀국한 시점의 나이가 신입교수 한계연령을 훌쩍 넘긴데다가, 김영삼정부 "세계화"의 기치로 우후죽순 늘어났던 "국제경제학과"는 대부분분 페업하거나 현상유지도 어려워진 시절이라 "국제금융"을 전공한 나로서는 비전이 암담해서 "더 늦기전에 돈이나 벌어서 노후에 대비하자"고 때마침 인터넷혁명의 여파를 타고 일어난 일확천금 벤처의 분위기를 타고 창업한 친구의 회사에 부사장으로 합류한 참이었다. 이미, 내가 살던 둥지는 깨트리고 나왔고, 여기서 실패하면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계속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 만나자. 만나서 얘기하자. 내가 무슨 잘못이 있으면 고칠께." 어렵사리 다음날인 토요일날 인사동에서 네사람이 만났다. 네명은 지방 명문 고등학교 동문이었다. 친구와 나는 고등학교 시절 급우였고, 나머지 둘중 한명은 2년 선배였고, 한명은 1년 후배였다. 나를 제외한 세사람은 대학교 동문이었다. 분위기는 느닷없는 인민재판이었다. 제대로 수용할 만한 이유도 없이 내가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 었다. 내가 회사의 지배구조에 해가 된다나?

성과없이 답답한 마음으로 토요일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일요일 아침,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이친구도 초,중,고,대 겹치는 것은 없지만 대학시절 각각 자기학교의 대학신문기자를 한 것이 큰 인연이었고, 처음부터 죽이 맞아 20대 초반 이래 20여년간 친구로 지내오고 있었다. 이 친구는 해운회사 경력을 바탕으로 수산물 수입회사를 설립하여 승승장구하다가 IMF의 여파로 곤경을 헤쳐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를 만나서 자초지종을 들은 친구의 말은 간단하고 단호했다. "니가 뭐 잘못했노? 그놈들이 나쁘지. 아무일도 없다. 월요일 그냥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면 된다." "그래도 관계개선을 위해서 내가 뭔가 할 일이 있지않을까?" "없다. 잘못한게 없는데 할기 뭐있노. 쫄지말고 열심히 일이나 해라."

마음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지만 친구의 말을 수용하기에는 나는 너무 무지하고 사회경험이 부족한, 뒷감당을 할 준비가 안된 짜였다. 사실 금요일 천화로 내게 해고를 통지한 그 친구가 어처구니없는 야비한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뭘 모르는 쑥맥인 그 친구를 부추긴 후배가 일종의 모사꾼이었고 나를 모함하고, 쌍팔년도 인신매매단이 서울역전에서 상경 시골처녀 납치하던 수법을 내게 시전한 것이었다. 내가 대로 대응하여 문제를 삼았다면 그 친구는 정말 곤란해졌을 것이다.(하지만 그래서 내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하여간 나는 월요일 아침 출근하지 못하고 밤에 사무실에 가서 야반도주하듯이 내 짐을 빼서 퇴거했다. 그 이후의 얘기는 별 할만한 것이 없다. 어차피 깨진 그릇 다시 붙여 쓸 것도 아니고 내가 그 횟가를 그만 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이후 동업하던 친구는 각종 동문들 경조사에서 마주치게되면 먼발치서 나를 보면 고개를 들지 못하였고, 나는 보복도, 용서도 하지 않은채 18년의 세월이 지나고 슬그머니 둘사이에 아무일도 없던 것 처럼 되었다. (사실 아무 일도 없었다. 뒤에 보니 둘이서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의 조언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조속한 마음의 안정보다도 세상을 사는 태도와 마음가짐이었다. "세상사가 작은 사건과 파의 연속인 것 처럼 보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원칙을 바탕으로 당당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그친구는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 그 이후 여러가지 크고작은 사건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 친구의 조언 "니가 뭐 잘못했는데?"의 전과 후의 나의 삶은 달랐다. 그 전이 물살치는 강에서의 항해였다면, 이 이후는 수평선너머 내배를 전복시킬 태풍의 일기예보에 조바심내지 않고 오늘 저녁 잔잔한 바다를 물들이는 서녘노을은 즐기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아온 것 같다. 고맙다 구야.              

작가의 이전글 앙장구의 생축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