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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남방 Apr 11. 2021

집에서 십 킬로의 자유



프랑스, 세 번째 봉쇄.


이천 이십일 년 삼월 중 발표.

'집으로부터 10킬로 미터 이내 반경 이동 가능'






퇴근길 발표를 라디오로 듣고 집에서부터 십 킬로를 걸으면 어디가 나올까. 길을 걷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이제는 봉쇄라는 게 특별할 것 없다는 듯 가까운 지하철의 지도 위에다 대충 한 뼘, 두 뼘. 이쯤이 십 킬로쯤이겠거니 하며 두 뼘의 반경을 허공에 그려본다. 그려진 원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하나씩 더듬어 보았다. 지금 당장 제약 없이 갈 수 있는 곳. 그렇게 하나씩 찾아가며 이어보니 어느 여행사에서 판매할 법 한 하나의 파리 여행 상품을 완성한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몽마르트르 언덕이었다. 집에서부터 걸어가면 약 구 킬로. 지난 연말에 걸어 본 길이었다. 파리에서 지도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가장 먼 장소. 작년 마지막 날 놓아둔 촛불 하나만큼의 소원은 까맣게 연소되어 어디쯤 나아가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다른 곳은 어떨까. 출퇴근 길 매일 보는 에펠탑은 집에서 걸어 칠 킬로 정도. 평범한 어느 여름날. 지나치는 가게마다 여름휴가를 간 탓에 비어진 가게를 보며 하염없이 걷다 보니 에펠탑이 나왔었다. 또 다른 날은 해가 저무는 파리를 퐁네프 아래에서 로제 와인과 함께 바라보다 그 취기에 에펠탑까지 걸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다 더위에 지쳐 아이스크림 가게에 머물기를 여러 번. 몇 번의 여름 저녁을 그렇게 걸으며 많은 기억을 새겨둔 길이다. 이어 퐁피두 센터, 마레의 여러 카페와 식당. 14구의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카페와, 16구의 세탁소. 셰익스피어 서점을 거쳐 파리에서 가장 예쁜 노을이 져무는 시테섬의 모서리. 아침마다 가는 루브르 박물관. 산책하듯 다녔던 피카소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 집으로부터 십 킬로의 거리를 가늠해 본다는 게 파리에서 좋아하는 리스트를 정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봉쇄가 주는 건 십 킬로의 물리적 한계보다 내가 사는 곳을 조금 더 알아가는 시간이 주어진 것 같다. 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는 것보다 걷는 것은 더욱 정성을 표하는 행동이기에 걸어서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좋아하는 장소를 먼저 떠올린다.


하루에 하나씩. 정해둔 곳을 걸어보았다. 점심시간을 틈내 걷기도 했으며 새벽 일찍, 달리는 길을 평소와 다르게 옮겨 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미션 수행을 하 듯, 지도에 하나씩 별을 새겨두었다 지워가며 제약 속의 자유를 누리다 이른 봄, 파리의 여름밤이 찾아온 날이 있었다. 어느 해부터인지 헤아려보진 않았지만 조금 이르다 싶은 봄이 왔을 때 여름밤처럼 느껴지는 공기도 더불어 같이 오곤 하였다. 그러면 일 년 중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 왔구나 싶어 퐁네프로 어김없이 달려 나갔다. 

아쉽게도 저녁의 시간까지는 그곳에 앉아 있을 수 없어 해가 어깨 뒤편 너머의 어디쯤 머물고 있을 때. 센 강에 가서 앉아 강물이 돌바닥을 치는 소리. 강바람에 흔들리는 옅은 나뭇잎의 소리. 물 위로 부서지는 햇살에 눈을 조금씩 찡그리다 공사 중인 에펠탑을 멍하니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의 봄은 이렇게 보내고 있다. 작년이랑 비슷한 듯, 다르게.

곧 파리에는 여름으로 가득할 거라는 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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