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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남방 Apr 21. 2021

엠 이에우

공간의 보통날



전화 통화 내용을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자꾸 전화기 너머로 엠 이에우라는 사람을 찾는다. 

같이 일하는 동료 T의 이야기이다.






T는 저기 머나먼 남쪽 나라 베트남에서 왔다. 나보다 다섯 살은 어린 나이에 놀랍게도 많은 것을 할 줄 아는, 그래서 기특하고 재능 많은 동생처럼 여기는 우리 팀의 막내이다. 그런 T는 일을 하다 열두 시 반이 되면 재빠른 속도로 밥을 먹고 회사 앞 흰 담벼락에 기대어 브레이크 내내 통화를 한다. 대충 보니 누구에게 영상 통화를 하는 거 같은데 나와 마주할 때와는 표정이 아주 다르다. 아, 이 녀석. 그 표정이 네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짓는 표정이구나.

그렇게 간파한 것은 사실 누가 보아도 알법하였다. 나만 눈치챈 것이 아니었으며 회사 사람들은 으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T는 머나먼 자신의 나라에 있는 누군가와 애처로운 장거리 연애를 하는 중이라는 걸.


어느 날. T는 밥도 대충 먹고 매일 하던 통화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자리에 앉아 괜스레 전화기만 만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말을 들어보니 여자 친구랑 지난 저녁, 그저 사소한 일로 대판 싸우고 지금은 어떻게 화해를 해야 할까 고민 중이란다. 그러더니 울리는 전화에 황급히 사무실 문을 열고 길거리로 뛰어 나간다.

하루가 끝 나가기 전 오후 회의에서 다시 만난 T의 표정이 오전의 것보다 밝았다. 회의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넌지시 물으니 그새 화해하여 다시 연락 중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아침내 고장 났던 마음이 잘 고쳐진 것 같다고.

고작 전화 한 통에 망가진 마음이 다시 잘 움직이는 아이. 그만큼 사랑이 마음의 전부인 아이. 그 말에 내 마음이 쥐가 나는 듯했다. 나는 언제부터 마음이 망가지는 게 두려웠던 걸까.


지나가는 계절 앞에 억울하다. 보고 싶다, 한 마디 뱉지 못한 말은 마음 위로 남아 그 부분이 쥐가 난다. 경직된 마음은 어쩌면 너의 전화 한 통, 문자 하나에 풀어지겠지만 봄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것은 일찍이 고장 났었다. 몇 년을 열병 앓았고 고장 난 마음이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을까 혹은 내가 크게 다치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으로 마음의 비어진 방을 가득 채웠다. 그러다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아가다 스쳐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다시 퐁네프로 향한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물에 비친 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물 위로 비친 나의 얼굴 위에 T의 표정을 중첩해보니 순간 반짝인다. 그것은 네가 고쳐준 나의 마음이 강물 위로 떠오르면서 비친 햇살과도 같은 빛 이었다.


며칠 후, 여전히 점심시간이면 열심히 통화하고 있는 T에게 은근슬쩍 엠 이에우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더니 그게 무슨 말이냐,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잘못 들었나 싶어 나에게 되묻더니 크게 웃으며 그건 자기 여자 친구의 이름이 아니란다. 자기가 여자 친구를 부르는 애칭이란다. 


엠 이에우는 베트남어로 '자기'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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