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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남방 May 16. 2021

여행의 선물

공간의 보통날


마음의 가장 외곽에 있는 것을 한 겹 벗겨낸다. 그 속엔 선연한 분홍빛깔이 힘차게 뛰고 있었다. 간혹 양파 껍질을 벗기고 볶는 일을 사랑하는 것과 비교를 하지 않는가. 겉에 당신이 가득 묻어 발버둥 치다 힘겹게 한 겹 벗겨낸다. 별안간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 알맹이만 남은 마음을 이리저리 볶아본다. 자글거리는 소리 뒤로 따라오는 고소한 내음에 그제야 깨닫는다. 애틋한 그리움의 어마한 크기를.


여행이 끝날 때면 항상 무엇으로 그곳의 계절이 지닌 바람 같은 것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사용한 영수증을 조금씩 모았었고 지금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사용한 표를 잊지 않고 챙겨 온다. 가끔은 부러 열 장이 한 묶음인 대중교통 표를 산 뒤 사용하지 않고 고이 간직해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 이야기가 궁금한 지인들 만나면 선물로 표를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단순히 한 장의 표가 아닌, 여행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숨겨 건네어 주는 그곳의 바람이 지닌 향이었다.

사용한 표는 언젠가 잉크가 휘발되어 흰 종이로 돌아가겠지만 책 사이에 보관하면 보다 오래 머문다. 사용한 표들을 내가 읽은 책 사이에 하나씩 꽂아 두었다. 그러다 가끔 책을 펴보면 그곳의 표를 보며 지난 여행을 떠올렸다. 표에 적힌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하나씩 더듬어 본다. 그러다 겹겹이 쌓인 세월이 지나쳐 그마저의 잉크가 휘발되었을 때, 그곳에 다시 돌아갈 계절이 찾아왔다 그리 여겨졌다.


포도밭에 짧은 산책을 나갔다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초콜릿 공장에 다녀왔다. 공장이 보고 싶었다기보다, 매장에 있는 거대한 초콜릿 폭포가 궁금했던 것이 아니었다. 같이 오지 못한 이곳의 바람의 향을 전해줄 수 있을게 무엇이 있을까. 버스표를 한 장 사 건네어줄까. 그러다 당장은 건네어 줄 수 없을 거 같은 마음에 조금은 오래 보관해 둘 수 있는 것. 고민하던 중 초콜릿 공장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나쁘지 않다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긴 줄을 선 후에서야 몇 가지 맛의 초콜릿을 구입할 수 있었다. 


수잔의 정원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일요일 아침을 보낸다. 끓인 커피를 여러 번 데울 정도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가만히 앉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에 맞추어 그리움을 한 겹씩 벗겨본다. 책을 읽다 한 문장에 마음이 덜컥여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려다 이전의 문장으로 되돌아온다. 누군가의 집에선 장작을 태우고 집 근처 성당에선 종소리가 울린다. 백 년 전 만들어진 주물냄비에서는 음식이 익는 냄새가 그 밑에서는 고양이가 밥을 먹는 소리가 겹쳐 고요한 일요일의 거실을 나지막이 메운다. 한 모금의 커피에 양파 같은 마음을 찬찬히 하나씩 벗겨보니 가슴에는 온통 번져있는 게 당신이었다. 참 많이 좋아하나보다, 그 사실을 어렴풋 마주함에 조금은 또 마음이 체하는 아침. 당신의 연락을 기다리다 밖으로 내리던 비가 천천히 잦아들면서 하늘이 게었다.



'나를 많이 오해했던 사람.

그래서 한쪽으로 내가 많이 미워했던 사람.'

-혼자가 혼자에게,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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