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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Jan 09. 2022

어떤 봄들

 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다 짧게 스쳐가는 장면에 한동안 머물렀다. 지연이 차에 자신의 할머니를 태우고 봄밤의 드라이브를 하는 장면이었다.   


할머니는 차창을 내리고 부드러운 봄바람을 맞았다. 바람에 할머니의 짧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날렸고 천변에는 꽃들이 한창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주현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밤공기에 옅은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기분 좋은 바람, 온전한 봄밤이었다. 할머니는 허밍으로 노래를 따라 했다. 


 봄바람에 새하얀 머리칼이 날리는 모습을 상상하다 문득 포근했던 어느 봄날이 떠올랐다. 과거에서 불어온 바람이 피부를 스치며 그때의 장면을, 연달아 수많은 봄날의 장면들을 한꺼번에 재생시켰다. 


 다신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완벽한 날씨에 머나먼 산의 나뭇잎들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날. 연인과 한가로이 산책을 하거나 나란히 벤치에 앉아있던 때. 길을 걷다가 우뚝 서서 하늘을 바라보던 시간. 퇴근길 드라이브하며 한강에서 불어온 바람을 맞던 찰나. 그런 순간들엔 어김없이 말이 없어졌다.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나면 조금 슬퍼졌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아쉽고 아까웠다. 속절없이 몸을 통과해버리는 바람을 붙잡아 한동안 곁에 두고 싶었다. 찰나의 행복을 흘려보내며 이 순간을 오래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걸 느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코 끝이 찡해졌다.


 눈을 감으니 수년에 걸친 봄의 풍경들이 끊기고 이어지길 반복하며 재생되었다. 어떤 것들은 아주 세세한 것까지 생생히 그릴 수 있었다. 몽글몽글한 추억 구름 속에 한없이 머물고 싶었는데 그조차 봄바람처럼 찰나였다. 가슴에 피어오른 감정은 형언해보기도 전에 사그라들었다. 막연한 그리움일 수도 있었다. 과거의 나를 향한 질투이거나. 뭐가 됐든 그다지 생산적인 일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반발심이 치솟았다. 아니, 사람이 생산적인 생각만 하고 살아야 해? 그게 로봇이지 인간이야? 그보다 나 애초에 별로 생산적인 인간 아니잖아. 왜 착각을 하고 그런담. 


 그렇게 합법적인 몽상에 빠졌다. 기억 속 아름다운 봄의 장면들을 쏟아부었다. 햇살 좋은 날 이불을 널어놓은 건조대 위에서 고롱고롱 포근한 낮잠을 자던 나의 고양이. 점심시간 동료들과 커피 한 잔씩 들고 걷던 벚꽃길, 그때의 웃음소리. 여행 갔던 섬에서 사진을 찍으려던 때 불어온 바닷바람에 뒤집힌 치마. 느지막이 일어나 동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아이스크림 든 채 골목을 거닐던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죽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버스커버스커 노래에 두근거렸던 벚꽃길. 너무 밝고 시끄럽고 북적거려서 더 외로웠던 봄날의 우두커니 선 순간들. 


 너무 그리워서 딱 한 시간만 다녀오고 싶은 봄도, 그때의 내가 안쓰러워서 등을 토닥여주고 싶은 봄도 있었다. 그 모든 순간들에 지금의 내가 빚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장면들로 채워진 봄이 있어 또 다음 봄을 기다릴 수 있었다. 


 쏟아진 추억들을 고이 접어 허공에 날려 보낸다. 또 언제 어딘가에서 봄바람이 불어오면 다시 내게로 돌아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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