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백지 앞에 섰다가 몇 번을 뒷걸음질 쳤다. 학교가 얼마나 괴로운 곳이었는지에 대해 쓰다가 온통 ‘싫다’라는 납작한 표현에 기댄 문장들이 보잘것 없이 느껴졌다. 그렇게 싫기만 했던 학교 생활에도 자퇴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10대였던 내게 자퇴는 자살보다도 멀게 느껴지는 무책임한 단어였다. 물론 지금에야 공교육 시스템을 벗어나는 방법을 슬기롭게 찾아내는 아이들이 부럽고 대견할 따름이다. 나는 대안학교라는 곳이 있다는 것조차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됐으니까. 그럼에도〈금요일(최진영의 단편집 《일주일》 중 한 편)을 읽으며 낯선 감각이 들긴 했다. '저렇게 쉽게 자퇴를 얘기한다고?' 하는 꼰대스러운 마음이 치솟았고, 딸의 자퇴를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엄마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물론 그전에 몇 번의 언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퇴한다는 딸에게 '후회해도 돼'라고 말하는 엄마라니.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소설이라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동시에 나도ㅡ설사 엄마가 된다면ㅡ저런 엄마가 되어야지, 하는 마음도.
중학교 3학년의 내가 자퇴 대신 찾아낸 건 도피였다. 학교 진로상담 시간에 주위 실업계 고등학교 과정들을 보다가 일절 관심도 없던 '제과제빵'에 꽂힌 것이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뽀송하게 부풀어 오르는 빵. 그리고 그 앞에 흰 조리복을 입고 선 나. 그전까진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모습이었지만 왠지 찰떡같았다. 아니 찰빵. 그날 밤 당장 엄마 앞에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고 통보했다. 내게 주어진 관심이라곤 5살 어린 여동생의 5% 정도라 여겼던 엄마에게선 예상외의 답이 나왔다. 절대 안 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렇게 난데없는 다툼이 불거졌다. 나는 실업계는 무조건 안 된다는 엄마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고 물으면 아무튼 안 된다는 말만 돌아왔다. 무조건 인문계로 가. 이유가 있긴 했다. 무조건 대학에 가야 하니까. 무-조건. 어떠한 조건도 없이. 그런 것치곤 대학 4년 내내 등록금 500만 원에 엄마가 매번 요청하는 생활비 100만 원까지 지난한 조건-부 학자금을 빚져야 했다. 졸업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통장 잔고를 갉아먹는 거대한 빚 말이다. 물론 열여섯의 나는 이렇게 고달픈 빚쟁이의 미래까진 알 리 없었다. 그저 학교든, 공부든, 대학이든 다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공부를 썩 잘하는 것도 아닌데, 수학 말곤 딱히 재미있는 과목도 없는데, 굳이 대학에 가야 하나? 그냥 실업계 가서 전문기술 배운 뒤 얼른 돈이나 버는 게 낫지 않나? 그런 막연한 생각이었다. 손가락 한 번 데어본 적 없는 내가 다짜고짜 제과제빵을 하겠다고 우겼으니 얼마나 비합리적인 땡깡이었을까. 꿈이나 목표가 명확한 것도 아니었으니 엄마의 입장에선 최선인 반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앉아서 '왜'를 두고 이상적인 대화를 나누어본 적 없는 모녀는 식어가는 치킨을 앞에 두고, 안 돼. 왜 안 되는데? 아무튼 안 돼. 엄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난 갈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라는 돌림노래만 치고받았다.
고작 열여섯인 나조차도 내 삶이 온전히 나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 선택의 책임은 엄마가 아닌 내가 짊어져야 하는 거였다. 비록 그 선택이 비극적인 결론을 불러올지언정 남의 선택으로 사는 것보다 행복할 거란 확신이 있었다. 나는 굴하지 않고 엄마와 팽팽히 맞섰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겠다는데 뭔 상관이냐고, 청소년 드라마에 나올법한 대사를 날렸다. 우리는 동네 호프집 뒷마당에서 치킨을 뜯다가 싸우고 있었다. 엄마는 500cc 몇 잔으로 얼굴에 붉은 기가 잔뜩 번져 있었다. 우리 가족이 치킨을 먹는다는 건 전날 엄마와 아빠가 심하게 싸웠다는 걸 의미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나서야 잊고 있던 오랜 관습이 떠오른다. 내가 기억할 수 있던 순간부터 엄마와 아빠는 지독한 부부싸움을 중독처럼 해댔다. 싸움은 꽤 컸고 새벽을 쿵쿵 울렸다. 그렇게 싸운 다음날이면 꼭 외식을 하거나 치킨을 배달시켜 다 함께 먹곤 했다. 그래도 아직은 같은 배를 탄 가족이라는 의미였을까. 그런 날, 남편 앞에서 억지웃음을 지으며 맥주로 최면을 거는 엄마에게 큰 딸이 경종을 울리고 나타났다. 겨우 한 매듭 고쳐 잡나 싶었을 때 또 하나가 어긋난 것이다.
같은 말을 몇 번씩이나 치고받았을까, 엄마가 울기 시작했다. 우는 엄마의 모습을 바로 맞닥뜨리긴 처음이었다. 슬프다기보단 화가 나서 우는 모습이었다. 기억 속 엄마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얼굴을 마구 일그러뜨린 채로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그때 엄마 입에서 어떤 말들이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운 단어만 생생히 떠오른다. 나는 우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그 얼굴이 추하다, 고.
그날 엄마의 눈물 이후 싸움은 멎었을 것이다. 우리는 치킨과 맥주를 남겨두고 다 함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모두 한 발짝 떨어진 채로 그렇게. 그 이후로 얼마간 더 실업계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는지도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당장 그날 억지를 끊어냈을지, 그 이후로 며칠을 동동 굴렀을지 알 수 없다. 지금 아는 건 결국 내가 엄마의 무조건 타령대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것. 결석 한 번, 지각 한 번 하지 않은 채 무사히 졸업을 했다는 것. 앞서 적은 것처럼 대학도 조건부로 가긴 했다는 것. 물론 졸업도 무사히.
싸운 다음 날의 풍경은 어땠을까. 그건 기억이 안 나도 금세 알 수 있는 일이다. 엄마는 지끈거리는 머리와 퉁퉁 불은 눈으로 어김없이 새벽 불을 켰을 것이다. 곤히 잠들어 있는 나를 깨우고 따끈한 밥을 해 먹였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아침부터 스팸과 계란을 구워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또 모른 척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고 엄마가 사준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갔겠지.
내 생각과 달리 나의 삶은 온전히 나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기엔 난 너무 열여섯 살이었을 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