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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창고 Aug 26. 2019

저마다의 걸음으로 걷는 성북동

산봉우리 울멍줄멍 성북

1. 성북동 왕돈까스    


 정릉동 고향집엔 일곱 식구가 살았다. 시부모를 모시며 슬하에 토끼 같은 딸 셋을 둔, 그야말로 구시대 대가족의 표본이었다. 2000년대 초반의 어느 일요일 낮이면 아빠는 온 가족을 대동하여 외식을 하러 가곤 했다. 3대가 한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은 ‘화목한 가정’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중산층·서민’의 기호이자 우리 아빠에겐 최고의 트로피였을 것이다. (그때도 KBS 주말드라마를 제외하면 거의 멸종된 풍경이었다.)


 일곱 식구를 욱여넣은 9인승 카니발이 옆 동네 산길을 무겁게 올랐다.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갈 때면 어린 세 딸들은 칭얼대느라 바빴다. 차에서 내린 곳은 이층 규모의 -놀이방이 구비된- 경양식 돈까스 식당이었다. 주차장은 항상 붐비었다. 누구네 집이라도 온 가족을 동원하여 ‘가족 외식’을 하러 오는 곳이 나의 성북동이었다.     


     

 내가 성북동에 대해 선명한 것은 어릴 적 아빠의 차를 타고 언덕을 오르내릴 때 양 옆으로 보았던 고급 주택가였다. 옆 동네인데도 해외여행을 온 마냥 이국적이었다. (실제로 성북동에는 대사관저가 많다.) 대부분 으리으리한 대문에 마당이 딸린 이층 집들인데, 밑에서 잘 보이지 않게 벽돌로 담장을 높게 둘렀다. 집집마다 차고가 하나씩은, 어쩌면 두 개씩 있는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선 차고가 딸린 대저택을 보기 어려웠다.


 제각기 생긴 고급 주택은 몇십 채나 이어졌지만 내 귀에 들리는 건 ‘우웅-’ 하는 디젤 엔진 소리뿐이었다. 인형의 집만큼이나 멈춰있었던 것 같다.     


 정말 신기했던 것은, 그렇게 조용한 부잣집 단지를 지나 도착한 곳엔 왕돈까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풍경이었다. 어디에 소개가 됐다느니, TV에 맛집으로 출연했다느니 간판엔 죄 홍보물로 가득했다.

경양식 돈까스 식당답게 식전에 크림 스프를 내주었다. 커다랗고 얇은 돈까스, 케첩과 마요네즈에 버무린 양배추, 마카로니 콘샐러드, 깍두기. 그리고 썩 웃기게도 오이고추(?)를 내줬다. 가족들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돈까스를 썰었다. 내 기억 속에서 이국의 집들과 돈까스가 뒤섞였다.           


성북동 왕돈까스,  돈까스에 오이고추가 썩 어울린다.



2. 변화하는 성의 북쪽 마을 

 

 성북동은 ‘성의 북쪽’으로, 1900년대 초 까지만 해도 번잡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옛말엔 앵두나무만 무성했다고 하니 먹을 게 썩 많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북동 옛 지명을 ‘마전터’라고 하는 것을 봐서 물 맑은 성북천 주변에 마전(광목을 빨아 햇볕에 말리는 것)을 업으로 삼은 이들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유명한 몇 예술가들이 일찍이 터를 잡긴 했지만 영양가가 떨어지는 땅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쉬이 닿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성북동은 많은 근현대 예술가들의 창작터로써 조용한 ‘교외’ 역할을 했다.   

   

예술가들의 조용한 교외, 성북동


 문인(文人) 상허 이태준도 그중 한 명으로 1933년, 성북동에 자리를 잡아 가족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랬듯 상허도 성북동의 경관을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을 터, 성북동에 대한 묘사와 생각을 가감 없이 글에 담아냈다.     


 아침마다 안마당에 올라가 칫솔에 치약을 묻혀 들고 돌아서면 으레 눈은 건너편 산마루에 끌리게 된다. 산마루에는 산봉우리 생긴 대로 울멍줄멍 성벽이 솟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여 있다. 솟은 성벽은 아침이 첫 화살을 쏘는 과녁으로 성북동의 광명은 이 산상의 옛 성벽으로부터 퍼져 내려오는 것이다…     
 <이태준, 성猩, 「무서록」>     


"산마루에는 산봉우리 생긴 대로 울멍줄멍 성벽이 솟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여 있다."


  이태준의 1930년대 소설과 수필을 보면 성북동에는 한옥과 서양식 집, 전통사회와 새로운 도시 생활방식이 혼재했다. 사대문 밖에 있지만 그럼에도 도심의 영향이 뻗치는 곳, 도심의 변화와 국가 재정비에 의해 언제나 변화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성북동의 변화해 가는 모습을 여실히 보았던 것이다.    


 요즘 성북동과 혜화동엔 짓느니 집이다. 작년 가을만 해도 보성고보에서부터 버스 종점까지 혜화보통학교 외에는 별로 집이 없었다… 올 가을엔 양관, 조선집들이 제멋대로 섞이어 거의 공지 없는 거리를 이루었다. 성북동도 지형이 고르기만 한 데는 공터라고는 조금도 없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만 집을 나서도 안 볼래야 안 볼 수도 없고 새로 짓는 집들이 자꾸 눈에 띄는 것이다…     
<이태준, 집 이야기, 「무서록」>     

     

지금도 성북동엔 기와지붕과 신식 건물이 혼재한다.
새 건물 올리길 기다리고 있는 성북동 공터



3. 저마다의 걸음으로 걷는 성북동 

 

 가족 식사를 마치면 아빠는 이따금 우리를 북악 스카이웨이로 데려가 주었다. 우리는 반짝이는 서울을 내려다보았다. 능선과 저녁 하늘이 경계 져 있고, 서울은 오목한 접시에 담긴 것처럼 산 아래에서 찰랑거렸다. 서울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는 경험은 특별했다. 자그마한 집들이 보였다. 고요함 가운데 멀리서 도시의 소리가 들려왔다. 

     

 댕그렁! 
가끔 처마 끝에서 풍경이 울린다.
가까우면서도 먼 소리는 풍경소리다. 소리는 그것만 아니다. 산에서 마당에서 방에서 벌레 소리들이 비처럼 온다…(중략)     

… 지금 내 옆에는 세 사람이 잔다. 아내와 두 아기다… 이들의 숨소리는 모두 다르다. 지금 섬돌 위에 놓여있을 이들의 세 신발이 모두 다른 것과 같이 이들의 숨소리는 모두 한 가지가 아니다. 모두 다른 이 숨소리들을 모두 다를 이들의 발소리들과 같이 지금 모두 저대로 다른 세계를 걸음 걷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꿈도 모두 그럴 것이다…     
<이태준, 고독, 「무서록」>     


성벽길에서 내려다본 성북동 밤 경치


 어느 날 상허는 달빛 내려앉은 잠든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내려보며 글을 썼다. 달밤에 홀로 깨어있으려니 상당히 고독했나 보다. 성북동 자택에 들려오는 풍경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헤집고 가족의 숨소리를 찾아 듣는다. 저마다 다른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저마다 다른 발소리로 다른 세계를 걷고 있음을 깨닫는다.


성북동에서 삼선교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성북동은 ‘모두 저대로 다른 세계를 걷’기에 마전을 하는 사람과 예술가들이 함께 살았고, 빈가 옆엔 부잣집이, 한옥 옆엔 양옥이 있었다. 돈까스에 오이고추를 함께 먹을 수도 있었다. 뒤섞인 만큼 풍부한 맛을 가진 동네가 되었다.


 많은 예술가의 창작터이자 상허 일가의 보금자리, 

 가족과 함께 한 기억이 있는 나의 두 번째 고향,

 저마다 다른 숨소리로 숨을 쉬고 다른 발소리로 걸으며 다른 꿈을 꾸는 성북동이다.          


2018. 07 성북동에서 파노라마

*     


참고     

<이태준, 「무서록」, 범우문고 109, 1999>     

<조형래, 이태준의 성북동, 이태준의 단편소설 및 무서록에 나타난 교외와 구석진 곳의 의미에 대하여, 상허학보, 2017>     

<이정숙, 한국 근현대소설에 나타난 성북동, 낙산 일대의 형상화 고찰, 2014>   

  

※ 제목 '저마다의 걸음으로 걷는 성북동-산봉우리 울멍줄멍 성북'은 이태준의 수필「무서록」의 '성猩', '고독'의 내용에서 따옴.


집필 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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