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적인 삶을 위한 토대
안녕하세요. 구제석입니다.
"계획 없는 퇴사"를 실행하고 약 50일 가까이 지나고 나니, 해방감에서 오는 즐거움은 점점 사그라들고,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에 대한 고민이 일상으로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직장생활은 저의 사고방식을 둔하고 편협하게 만들었고, 타인이 정한 편리한 리듬에서 벗어난 불규칙한 생활은 점점 일상을 뒤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만의 리듬을 구축하고, 이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만나거나 장소를 방문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 독서를 통해 이러한 사례들을 조사하고 분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번 포스트에서 스스로 정의한 "주체적인 삶을 위한 태도 (방향성)의 관점"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읽고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자들의 공통점은 전통, 관습, 거대 시스템에서 벗어나 하나의 개인 또는 작은 규모를 유지하며 자신만의 리듬으로 스스로 성장한다는 점입니다. 내면과 깊은 대화를 통해 스스로 살아가는 방식을 개척하면서도, 이상에 빠져 허우적 대지 않도록 세상에 스며드는 방식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자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영향력'입니다. 안도 다다오를 제외하면 누구나 알만큼 유명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다만 이들은 각각의 영역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재치 있는 언변뿐이거나 교묘한 상술이 아닌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로 가까운 지인부터 환경이라는 거대한 주제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저는 이들의 방식을 답습하여 자율적인 삶의 토대를 만들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대형 프로젝트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기 때문에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고객을 모집하기 위해 높은 비용을 지불합니다. 다수의 대형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일을 하며 위화감을 느낀 부분은 고객을 모집하는 부분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었으니 당연히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노력도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제가 몸담았던 프로젝트의 대부분은 투자된 비용 대비 결과는 초라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자들은 작은 규모 안에서도 사람들이 절로 모이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차이가 진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상이 부동산이건, 슬로건이건, 건축이건, 재활용 가구 건, 이들은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퇴사를 실행하게 된 계기는 코로나 시국 속에서 재택근무 방식의 커리어와, 가장으로서 삶을 지탱해나가면서 내면이 망가지고 "자신"이 사라져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현실을 마주 했을 때였습니다. 빠른 성장, 효율 속에 갇혀 버린 일상은 이런 감정을 돌볼 정도로 가볍지도 여유롭지도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많고, 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던 본연의 모습은 사라지고 youtube에서 자동으로 틀어주는 음악과 netflix에서 골라준 시시한 콘텐츠나 소비하며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어버린 거울 속의 자신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불안했지만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행복했던 20대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뜩 좋아했던 영화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웨스 엔더슨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원제: Rushmore)"
20대에 접했던 이 영화는 무의식속에 깔린 체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40대가 된 저에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 남은 삶 동안 계속해볼 만한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기 전에, 좋아했던 것들에 열광하던 감각을 되돌리기 위해 조금씩 과거의 취향을 더듬어 가며 아카이빙을 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