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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name Mar 13. 2022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전문학


프리드리히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며 '초인'과 '영원회귀' 등을 강조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적 사상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책으로, 10년간 산에서 정신과 고독을 즐기던 차라투스트라가 하산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내용이다. 일반적인 철학서와 달리 주인공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을 만나 경험한 이야기로 철학적 사상을 설명한다.


책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 니체의 '초인'과 '고립'이 각각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철인 사상'과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사유'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고 느껴졌고, 여기에 신을 부정한 니체가 인간과 현실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을 중심으로 책을 읽으니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느낀 것이 잘 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책은 내가 이해하기 나름이니까... 시간이 지나 다독을 하면 더 많은 것이 이해될 것이라 생각한다. (교수님들조차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책이라고 하는데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



자기가 자아에게 말한다.
"여기에서 고통을 느끼라!" 
그러면 자아는 고뇌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이상 고뇌하지 않을 수 있을지 숙고한다.
바로 그 때문에 자아는 사고해야만 한다.

자기가 자아에게 말한다.
"여기에서 쾌락을 느끼라!"
그러면 자아는 기뻐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자주 기뻐할 수 있을지 숙고한다.
바로 그 때문에 자아는 사고해야만 한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신은 죽었다




차라투스트라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세상을 만들고, 욕망하는 자기 삶의 주인이다. 즉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만 결국 자기 의지로 행동하고, 그 행동에 책임을 지는 존재인 것이다. 이런 인간에게 신을 믿고, 내세를 바라는 것은 자기 회피의 수단이며 고통을 잊기 위한 망상이다.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하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이 과정에서 인간은 성장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넘어 자신의 행동의 결과까지도 회피하기 위해 신을 만들었다. 인간이 경험한 모든 것이 곧 신의 뜻 하나로 정리되는 것이다.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은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규정한 인형일 뿐이다.


사후 세계를 믿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은 인간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준다. 나라는 존재가 현실에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죽은 후 내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 죽더라도 신의 세계에 갈 수 있다면?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에게 절대적 존재와 공간은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이 된다. 내가 죽더라도,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내세에선 행복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차라투스트라에게 신이란 인간에게 무익한 존재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으로,
신으로 여기지 않으려 하는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너는 해야 한다, 이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대항하여 "나는 원한다."라고 말한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차라투스트라가 신을 부정하는 이유는 또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성직자들은 '선'만을 강조하는 위선자다. 인간은 마냥 선한 존재가 아니다. 저마다 살아온 환경도, 생각하고, 욕망하는 것이 다르다. 나에겐 필요하고 옳은 일도, 누군가에겐 불필요하고 부정한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선과 악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선'만이 정의라고 말한다. 더군다나 이들이 말하는 선은 신의 뜻이다. 만약 인간이 모든 행동을 '선'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언뜻 따뜻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의지도 아닌 신의 의지로 행해지는 선은 무한한 인간의 본성을 억제하는, 가치를 유한하게 만드는 것이다.






고독과 몰락 그리고 초인 (feat. 자유)




차라투스트라에게 인간은 '창조하는 자'다. 인간은 아는 만큼 보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어떠한 대상도 단순히 세상에 존재한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가치를 부여해야만 비로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에게 가장 이상적인 인간은 '초인'이고,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바로 초인이다. 앞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10년간 산에서 정신과 고독을 즐기던 차라투스트라가 세상으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내용이라 했다. 즉 초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고독과 몰락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 존재가 형성된다. 그렇기에 우린 나보다 상대를 우선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다른 사람의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나의 감정보단 상대의 감정을 먼저 생각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과정은 결국 나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나의 생각, 나의 감정은 사라진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타인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고독을 예찬한다. 혼자 나를 온전히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나의 감정과 생각의 이유가 명확해지고 내가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자신에게서 도피하여 이웃 사람들에게로 달아난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의 덕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몰아(沒我) 현상의 정체를 꿰뚫어 본다.

'너'라는 말은 '나'라는 말보다 더 오래되었다.
'너'라는 호칭은 신성하게 불리지만
'나'라는 호칭은 아직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웃에게 몰려가는 것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인간은 긍정보다는 부정에서, 선보다는 악에서 더욱 성장한다. 즉 몰락과 경멸의 과정이 인간을 한층 성숙하게 만든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구절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처럼 긍정은 그 모습이 비슷하다. 수많은 드라마, 영화, 소설의 해피엔딩이 거의 비슷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부정은 그 모습이 각양각색이다.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부정과 악을 지향하라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밝음에 끌리는 인간 중 누구도 자발적으로 어둠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어둠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 어둠은 평생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 역시 느낄 수 없다. 꼭 직접 경험할 필요는 없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그 감정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 역시 우리의 사고를, 감정을 더욱 풍성하게 해줄 수 있다.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밝음만을 보는 것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대 창조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의 삶에는 수많은 고통스러운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그 모든 무상함의 대변자가 되고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초인이 되기 위해선 고독과 몰락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어둠은 우리가 더욱 성장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 어둠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밝음 만을 경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우린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보지 말되, 결국 지향해야 하는 것은 밝음이다. 그래서 고독과 몰락을 예찬하는, 그 속에서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만을 예찬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다. 때로는 혼자보단 누군가의 존재가 더 큰 힘이 되고, 그 관계 속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전적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찰하는 과정이 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차라투스트라는 사실상 니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면서 니체가 너무 나르시시즘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따로 없다. 초인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하대하고,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가장 이상적인 인간을 그리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초인은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인 것 같다. 성숙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감성은 그 힘을 잃는다. 하지만 감성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의 전유물로, 이성만이 진정한 어른의 상징이 된 사회 속에서 가끔은 동심을, 그 순수함을 그리워하게 된다.



여기 고독 속에서는
모든 존재의 말과 그 말의 상자가 나를 위해 활짝 열린다.
모든 존재가 여기에서는 말이 되려고 하여,
모든 생성이 여기에서는 나로부터 말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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