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
내가 읽은 조앤 디디온의 네 번째 단행본이다. <<상실>>만큼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글들을 모은 이 책은 몇몇 글들이 무척 인상적이다.
<단편소설을 쓴다는 것> (1978)에서는 잡지 보그에서 일했던 경험을 일하고, 홍보광고문구 예시를 열거한 뒤 이렇게 쓴다.
“이런 식의 '글 쓰는 행위'를 경시하기는 매우 쉽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그런 글을 경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말을 편안하게 대하는 법을 배운 곳도 《보그》지에서였고, 단어들은 내 불충분함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도구이자, 장난감이자, 종이 위에 전략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 무기라는 사실을 배운 것도 《보그》지에서였다. 가령, 8줄짜리 사진 설명이라면, 한 줄에 딱 27자가 들어가야 한다. 단어 하나 정도가 아니라 글자 한 자가 중요하다. 《보그》에서 일하려면 빨리 배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붙어있을 수가 없다. 단어를 상대로 게임을 벌이고, 말을 잘 듣 지 않는 종속절 한두 개가 든 문장을 타자기에 통과 시켜 정확히 39개의 글자로 이루어진 간단명료한 문 장으로 만드는 법을 배운 것도 《보그〉지에서였다. 우리는 동의어의 명장이자 동사의 수집가였다.” (135)
단어 하나, 글자 하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작가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짧고 명료한 광고문구를 쓰며 그 날카로움, 섬세함을 배웠다니 더 "멋있게" 느껴졌다. 주위에 흔해 빠져 그냥 지나치기 쉬운 광고 속 문장 하나가, 평범해 보이는 문구가 얼마나 치열하게 생각하고 나온 결과인지 말하는 것이니.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 최재천 교수님의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책읽기를 일로, 치열하게 해야 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세상의 모든 일이 결국은 글쓰기로 귀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영상을 전부 보지 않아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글쓰기 따위 안할 거야, 장사/사업해야지 하는 사람도, 치킨집을 하는 사람도 결국은 전단지 문구라도 써야하고, 그게 얼마나 잘 읽히고 의미 전달이 잘되게 쓰는가는 많이 읽은 사람일수록 그럴 거라는 결론이(었을 것이)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고.
조앤 디디온이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에서 말했듯이, 나 역시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언어의 통달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몸 바쳐 믿고"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단어 하나를 더 알고 그걸 내 것으로 만들면 내 지경이 넓어진다 생각한다. 좀 더 게걸스럽게, 열성적으로 책을, 그 안의 지식을 흡수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자기가 선택한 대학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것에 관해> (1968)
“내가 스탠퍼드에 합격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인 다음 내게 뭘 마시고 싶은지 물었었다.
부모들이 자녀의 ‘기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던 아버지의 행위를 다시 떠올리며 감사해하곤 한다. 부모들이 자녀의 기회를 자신의 기회와 뭉뚱그려 하나로 생각하면서 자녀에게 자신뿐 아니라 부모의 영광을 위해서 성취해 낼 것을 요구하는 느낌을 줄 때면, 나는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해진다. 물론 요새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 물론 '모두가 원하는' 대학의 정원보다 훨씬 많은 아이가 지원한다. 그러나 '모두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전적으로 아이를 위한 것인 척하는 것은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다.” (80)
1968년에 썼다는 이 글을 읽고 2024년에 나는 킥킥 웃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이 부분을 읽어주었다.
언젠가 대학에 들어갈 아이들을 둔 엄마로서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며 살아간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매우 강하게 다짐하지만 혹시 변할지 나도 알 수 없다.
“사실 어린 나이에 거둔 성공이나 실패는 그 어느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더 신경 써야 할 일은 따로 있는 것 같다. 그 나이대의 성공이나 실패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우리의 기대와 그들의 기대를 분리하는 방법을 찾아내며, 실패의 경험과 뾰로통한 십 대의 반항기와 마주칠지도 모를 프로 골퍼들과의 관계 등을 누구의 훈수도 없이 혼자 헤쳐 나가도록 내버려 둘 방법을 찾는 것 말이다. 열일곱 살에 자신의 배역을 찾는 것만도 어려운 일인데 다른 사람의 대본을 쥐여주는 혼란까지 초래하지는 말자.” (82)
딸들아, 너희의 배역을 찾으렴.
<내가 글을 쓰는 이유> (1976)
“'좋은' 글을 쓰는 사람, 혹은 '나쁜' 글을 쓰는 사람의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 종이 위에 단어를 배열할 때 가장 집중하고 정열을 쏟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면, 글 쓰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 거예요. 조금이라도 사고할 능력을 갖추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면, 글 쓰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글 쓰는 이유는 전적으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보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이지요.” (116)
디디온은 자신이 추상의 능력이 없는, "형상화"라는 단어와 눈 앞에 보이는 것, 그려지는 것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며 이런 글을 썼다.
자신의 생각을 알기 위해 글을 쓴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과 다른, 글을 쓰는 것이 무언가를 구체화시키는 과정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