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묵은 욕실과 부엌 타일을 몽땅 깨부수고 나니 그 뒤에는 시커먼 콘크리트 벽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너무 시커매서 좀 불안하고 당황스러웠다. 뽀얗고 보드라운 속살이라도 나올 거라고 기대했던 것일까. 누가 말해주지 않았어도 타일을 걷어내면 그 뒤에 콘크리트가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했지만, 오히려 너무 당연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이었다. 울퉁불퉁하고 시커먼 서른한 살 건물의 속살을 훔쳐보고 있자니 나 진짜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싶어서 아득한 기분만 들었다. 태어나서 실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 덧방과 까대기 |
제주는 철거와 폐기물 처리 비용이 다른 곳에 비해 두 배 정도는 비쌌다. 섬이라서 폐기물을 수용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서 그런지 인건비와 더불어 폐기물 처리 비용도 훨씬 비싸다고 했다. 제주가 아니었다면 몇 십만 원을 아낄 수 있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꽤나 아렸지만 어쨌거나 건너뛸 수는 없는 과정이었다.
철거 시 우리가 궁금해한 것은 두 가지. 하나는 큰방 미닫이문의 문틀을 없앨 때 나머지 부분은 그대로 두고 아래쪽 문틀만 떼어내는 것이 가능한지. 다른 하나는 부엌과 욕실의 타일을 전부 다 걷어내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는지. 사실 타일은 오래된 타일 위에 새로운 타일을 덧붙이는 ‘덧방’과 모두 다 벗겨버리는 ‘까대기’ 중에 어떤 방법이 나을 것인지도 고민이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더니 까대기를 하면 방수를 다시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이 배로 커진다고 했다. 덧방은 비교적 간단하지만 오래된 집이라면 처음부터 까대기를 해서 누수를 확실히 바로 잡는 게 좋을 거라는 말도 있었다. 여전히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을 입에 올리며 뭣도 모르는 애 두 명이서 진전도 없이 무의미한 토론만 계속했다. 정말로 인테리어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던 우리는 마음만 급할 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일단 철거팀을 불러 우리집을 보여줘 보기로 했다. 뭔가를 저질러야 머리가 그나마 굴러갈 것 같았다. 철거팀을 두 팀 정도 불러 현장을 보여드린 후 조금 더 믿음직스럽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노력해 줄 것 같은 쪽을 택했다. 고작 10분, 15분의 대화로 믿음직스러움의 여부를 결정짓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타일은 고민 끝에 까대기로, 미닫이문 문틀은 아래쪽만 없애주기로 하셨다. 문틀의 아래쪽만 떼다 보면 바로 옆 마룻바닥이나 나머지 문틀에 손상이 갈 가능성도 있다고 했지만 그 부분은 감수하기로 했다. 그 외에 또 철거하기로 한 것은 오래된 집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던 아파트식 대형 신발장, 부엌 싱크대와 상하부장, 욕실에 들어있는 모든 것, 그리고 십자가 모양의 싸구려 형광등, 장판 등이다.
tip. 타일을 까대기 하기로 결정하기 전 욕실 리모델링 업체에 문의를 한 번 해봤다면 어땠을까 나중에 조금 후회했다. 철거 업체는 말 그대로 철거만 할 뿐이지 그 후의 공정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도 철거팀 말만 믿고 아무 생각 없이 까대기 했다가 그게 쓸데없는 짓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목공 공정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결과적으로는 까대기를 한 덕분에 방수 처리도 꼼꼼히 다시 하고 물 샐 걱정 없는 튼튼한 욕실이 되긴 했지만, 혹시나 쓰지 않아도 되는 돈을 지출하게 될 바에야 해당 공정의 전문가에게 문의해 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혹시나 욕실 인테리어를 반셀프로 해 보기로 작정한 분이 계시다면 무작정 까대지(?) 말고 욕실 업체 사장님께 먼저 여쭤 보시길 바랍니다. 까대기를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일 수도 있어요.
| 진짜 시작 |
우리집은 우리를 포함하여 총 여섯 가구가 사는 3층짜리 빌라의 꼭대기 집이었다. 그래서 철거를 시작하기 전에 집집마다 인사도 드릴 겸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경험해보지 않은 터라 얼마나 시끄러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시끄러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러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곧 이사 올 사람들이라고 소개한 후 당분간 리모델링을 하느라 소란스러울 수도 있다고 양해를 구하며 준비한 빵 봉지를 하나씩 건넸다. 우리 빼고는 전부 나이가 지긋하셨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건너편 신축 아파트에 사는 모양이었다. 우리 동네는 초등학교를 가운데에 두고 한쪽은 신축 아파트, 반대쪽은 나지막하고 허름한 빌라촌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우리가 살기로 한 쪽은 오래된 집들이 많은 빌라촌이었다. 그러니 이웃 중엔 당연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았다. 신혼부부들은 전부 반대편 신축 아파트에 살 텐데 이런 곳에 집을 사서 셀프 인테리어를 해 보겠다고 우기고 있는 우리가 처량하기도 하고 조금은 특별한 사람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철거를 시작하고 보니 소리는 생각보다 더 시끄럽고 먼지도 많이 났다. 타일을 떼어내기 위해 드릴을 쓸 때는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이어졌다. 얼마 전 우리집 아래층도 욕실 리모델링을 하는지 드르르르.. 윙윙윙윙.. 드릴로 벽을 뚫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며칠 동안 정말이지 미치는 줄 알았다. 우리집 리모델링할 때도 이렇게 시끄러웠겠구나 생각하니 이웃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출근이라도 했으면 아무 문제없었겠지만 나는 출근도 안 하는 백수 상태라서 하루 종일 벽 뚫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집 강아지 마농이에게 연신 괜찮다는 말을 해주어야 했다. 철거를 시작하기 전 같은 건물에 사는 분들께 양해를 구한 것은 백번 잘한 결정이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전부 들어내고 오래된 타일까지 걷어내면 진짜로, 정말로, 시작이다. 보통은 각 공정별 기술자를 일정에 맞추어 먼저 섭외해 두고 일을 착착 진행하는 형태이지만 우리는 그냥 각 단계가 끝나면 그때마다 기술자에게 연락을 취하는 방법을 택했다. 아니, 방법이 그것밖에 없던 건지도 모른다. 맞벌이 직장인 부부이자 인테리어 알못이었던 우리는 각 공정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되는지 알 턱이 없었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심심찮게 일어나 시간이 지체되곤 했으니까. 일정을 맞추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느니 마음 편히 우리의 스케줄에 맞추어 기술자를 섭외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공정 사이사이에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는 텀이 생기기도 했다. 기술자도 미리 잡아둔 작업 일정이 있어 우리가 연락하자마자 달려와 주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텀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벽지 떼기와 페인트칠)로 꽉꽉 채웠다.
인테리어 업체에 한 번에 의뢰해 버렸다면 생기지 않았을 무수한 시행착오와 텅 빈 시간들. 덧방, 까대기, 핸디코트, 우레탄... 낯선 용어들에 둘러싸여 머리는 아프고, 집을 완성할 수는 있기나 할까 의심이 드는 나날이었다. 투잡 뛰는 사람들처럼 퇴근하면 곧장 현장으로 직행해 먼지 구덩이에서 배달음식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허기가 대충 가시면 밤늦도록 조용히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이를테면 벽지 떼기, 핸디코트 작업, 페인트칠 같은 것들. 그러고 나서 집에 가면 곧바로 엄청나게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두세 달 정도 이어진 노동의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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