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동 302호’ 이후로 다른 집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찾으려는 의지를 상실해 버렸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집을 찾는 데 노력을 들이는 대신 틈이 날 때마다 수시로 ‘B동 302호’를 들락날락거렸다. 이미 마음은 거의 굳어져서 엄청나게 심각한 하자를 발견하지 않는 이상 계약을 물릴 일이 없었기 때문에 벌써 우리집 같은 마음이 들었다. 자꾸자꾸 보고 싶었다. 비밀번호도 이미 받아두었겠다, 회사에서 가까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겠다, 자주 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회사 점심시간마다 ‘B동 302호’를 둘러보러 왔다. 어떤 날은 해가 아주 잘 들었고, 어떤 날은 비가 내렸다. 왜, 연애를 막 시작하기 전 콩깍지가 쓰여서 상대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고 나쁜 점이라고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시기 있지 않은가. 당시의 내가 딱 그랬다. 상대와 막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 해가 난 날은 -채광도 좋아!, 비가 오는 날은 -어쩜, 비 와도 운치 있네! 아마 태풍이 불어 집이 흔들려도 주책맞게 좋다고 했을 거다.
전 주인이 아주 좋은 사람 같아서 우리는 이 집이 더 좋아졌다. 우리는 그를 창호 씨라고 불렀는데, 창호 씨는 아이 셋을 키우는 동안 줄곧 이 집에서 살았다고 했다. 큰 아이가 대학을 갈 때가 되어서야 마침내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는 모양이었다. 가족 다섯 명이 살기에는 많이 비좁았을 텐데. 자그마하고 마른 체구에 얇은 은테의 동그란 안경을 쓰고, 너무 커서 남아도는 양복을 펄럭거리면서 걸어 다니던 남자였다. 통통 튀는 듯한 가벼운 걸음걸이를 지녔는데,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약간 벗어진 그의 머리 위에서 얼마 안 되는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겉보기에도 검소하고 빈틈이라고는 없는 만화 속 캐릭터 같았던 그는 집 관리도 그렇게 했던 듯싶다. 애지중지 다루었던 것은 둘째 치고, 오래되어 하나하나 차례대로 고장이 날 때마다 미루지 않고 직접 수리를 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세심한 주인 역할을 이어받아 집을 관리한다면 집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이었다. 지금까지 집을 사랑해 온 사람과 이제 막 그 집과 열렬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 사이의 계약이었으니, 아무런 부침이나 스트레스 없이 착착 진행된 것은 당연하다.
| 집을 소유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
마침내 ‘B동 302호’는 우리집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찝찝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내 꺼’가 된 15평 집이 나를 훅 덮쳐 올 것만 같았다. 그토록 원했던 집이었는데, 우리집이 되는 순간 이렇게 날 배신해 버리다니. 내가 ‘집’씩이나 되는 큰 물건을 가질 만한 자격이 되나. 집을 가지게 되었는데 난데없이 죄책감이 들 건 또 뭐람. 이제는 우리집이 된 ‘B동 302호’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예상치 못한 감정이 들어 나조차도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집 같은 거 없을 때가 마음은 훨씬 편했네 싶기도 하고.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잠자코 있던 ‘무소유’의 개념이 사고의 범위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지만 우리에게는 무소유니, 소유니 한적하게 토론이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당시 우리의 거주지는 연이가 제주로 내려오기 전 나 혼자 살던 1.5룸이었는데 그 집의 계약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계약이 끝나는 시기와 ‘B동 302호’의 리모델링이 끝나는 시기가 맞물리면 딱이겠다고 우리끼리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하루라도 빨리 집고치기를 시작해야 했다. 갑자기 집을 소유하게 된 바람에 혼란스러웠던 나의 심경은 다행히도 집고치기를 시작하며 그 수고로움에 밀려 괜찮아졌다.
|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는 일 |
때로는 무언가를 남기기보다 한꺼번에 바꿔버리는 것이 오히려 더 간단할 때가 있다. 새 것과 원래 있던 것의 어울림을 생각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새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급격히 좁아진다. 아무거나 했다가는 분명 너무 별로여질 테니 대충 하기는 싫었다. 우리집 리모델링이 딱 그랬다. 나무 샤시와 문은 애초에 바꿀 생각은 없었으니까, 다른 부분을 바꾼다면 반드시 걔네들과 잘 어울려야만 했다. 오래된 나무의 빈티지함이 적당히 강조되면서도 튀지는 않았으면 했는데, 그러면 인테리어 초보들에게 결국 가장 안전한 선택은 ‘화이트’였다. 나는 원래 패턴도 좋아하고 색도 좋아하는 사람인데 우리집에는 이미 ‘나무’라는 포인트가 있었기 때문에 밑바탕은 그냥 무난하게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좁은 집이 넓어 보이는 효과도 있을 테고. 창호 씨가 이사를 가며 깨끗한 흰색 벽지로 도배를 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별로 할 게 없었다. 처음에는 의욕이 넘쳐 벽지를 모두 떼어 버리고 페인트칠을 하려고 계획했었는데, 부엌 공간의 벽지를 떼고 페인트칠을 해 보며 그 계획은 슬그머니 없던 일이 되었다. 직접 해 보니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닥에는 장판을 걷어내고 큰 화이트 무광 타일을 깔기로 하고, 부엌 쪽의 오래된 마루는 예뻐서 그대로 두었다.
그대로 두기로 결정한 것들
나무 샤시 | 다른 건 포기해도 절대 포기할 수 없던 것
방의 벽지 | 전부 떼고 페인트칠하려고 했으나 일부 해 보고 깨끗이 포기
부엌 쪽 원목마루 | 부엌 쪽 바닥만 마루로 되어 있었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나무로 된 문들 | 나무 샤시와 함께 이 집을 선택한 이유
앞뒤 베란다 타일과 현관 바닥 타일 | 오래되어 낡았지만 모양과 색이 귀여웠다
큰방 미닫이문의 나무 문틀 일부 | 아래쪽 문틀은 철거하고 나머지는 남겨두기로 했다
전부 다 노후되어 있었던 욕실과 부엌은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기로 하고, 안방으로 쓰였을 법한 큰방을 터서 거실 비슷한 공간으로 쓰기로 했다. 15평 집에 방이 세 개나 되다 보니 거실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내린 선택이었다. 더군다나 두 명이 살 집에 방이 세 개나 있을 필요는 없었다. 큰방으로 이어지는 미닫이문 두 짝과 아래쪽 문틀을 없애고, 윗부분과 양쪽 문틀은 남겨서 네모난 아치처럼 두면 대충 원하는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대충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꿀지가 정해지고 나면 다음으로 할 일은 철거. 집고치기의 본격적인 시작이자 고생길이 열리는 순간이다. 무자비하게 깨부수어진 타일들, 누런 변기와 세면대 등등... 집에서 끊임없이 폐기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내가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건가 싶어 머릿속이 하얘진다. 하지만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의집 온라인 집들이 화려한 결혼식 대신 소박한 집을 직접 고쳐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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