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무원을 그만둔 이유
오늘 하게 될 이야기는 좀 재수 없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가장 숨기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내가 잘하는 것이라 마냥 숨겨지지도 않는 이상한 이야기이다.
7월 한 달 동안 와인 수업을 들었다. 재미있고 맛있어서 열심히 했다. 일요일마다 이론 공부와 더불어 열 가지가 넘는 종류의 와인들을 입에 한 모금 남짓 머금었다가 취하지 않기 위해 다시 뱉으면서 시음했다. 직접 마셔보지 않고는 와인을 제대로 공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떤 와인에서는 지중해의 짭조름한 바다내음이 났고 어떤 와인에서는 알프스 산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고 또 어떤 와인은 아프리카의 거친 야생을 담고 있었다. 공부의 끝에는 역시나 시험이 있었다. 나는 레벨 1과 레벨 2를 공부했기 때문에 객관식 시험만 보면 되었다.
한 달 여의 기다림 끝에 지난 9월 1일 레벨 2의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합격. 합격 여부만 문자로 받았기 때문에 점수가 궁금해진 나는 아카데미로 전화를 걸었다. 시험을 친 직후 나의 감으로는 100점 아니면 50문제 중 한두 개 틀리는 정도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꼭 확인해 보고 싶었다.
제주에서 7월 말에 시험 봤는데 점수가 궁금해서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고건녕이요. 안녕할 때 녕.
(한참을 뒤적인 후) 아, 백점이시네요.
아.. 네...
백점이라니까 좋긴 좋았는데 갑자기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좋다고 호들갑을 떨어야 하나. 그건 너무 주책 같잖아. 아니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당연히 백점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 같잖아.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머쓱해져서 인증서 수령 주소 변경으로 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꼭 자랑하려고 전화한 것 같은 꼴이 된 것이다.
4년 전 공무원 시험을 본 이후로 나에게 제법 큰 의미가 있는 시험이었다. 퇴사 후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를 처음으로 제대로 배운 것이었고 그 결과가 눈에 보이는 실물로 나타나는 거였으니까 결과도 중요했다. 한 달 동안 50가지가 넘는 와인을 마시며 공부했는데 객관식 시험으로 지식 평가를 한다니 왜인지 아쉬웠다. 아무리 낮은 레벨의 시험이라고 해도 다른 시험도 아니고 와인 시험인데 실기가 포함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직접 마시고 어떤 와인인지 추측해 보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레벨 3 단계부터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사실 시험이 객관식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나에게는 유리할 터였다. 나는 남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능력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객관식 시험에서 높은 점수받기’이기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객관식 시험만 봤다 하면 잘 보는지 모르겠는데 나 같은 케이스가 존재하는 걸 보면 남들보다 객관식 시험을 특별히 잘 보는 능력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걸 공부를 잘한다고 해야 하는지 시험을 잘 본다고 해야 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과 같은 주입식 교육의 나라에서 살면서 객관식 시험을 잘 보는 능력은 누가 뭐라 해도 나에게 득이 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초등학교 때는 물론이고, 중학생 무렵부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르며 길들여져 온 컴퓨터 사인펜 사용법과 오엠알 마킹법. 취업을 위해 보았던 몇 차례의 토익 시험. 취업에 실패하고 응시했던 공무원 시험. 최근에 본 와인 시험까지. 생각해 보면 인생이 객관식이었다. 객관식 시험은 사람을 줄 세우기 위한 가장 쉽고 편리한 형태의 방법이었지만 비극적이게도 시험 응시자들의 부드러운 뇌를 가장 빠르게 굳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했다.
나의 뇌는 중학생 무렵부터 객관식 시험에 엄청난 두각을 나타내며 빠른 속도로 그쪽으로만 발달해갔다. 그 당시 중학교에 입학할 때 반배치 고사라는 걸 봤는데 거기서 나와 공동 1등을 한 어떤 남자애가 전교생 앞에서 상장을 받는 모습을 보고 빡치면서부터 나의 공부 인생이 시작되었다. 내가 아니라 걔가 단상 위에 올라가서 상을 받은 이유는 국어 점수가 더 높았기 때문이라는데 그 이유를 들어도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았다. 쓸데없는 승부욕은 나를 소위 말하는 모범생의 길로 인도했다. 나는 교과서를 복사한 것처럼 외우는 애였고 그렇게 해서 3년 동안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중3 즈음되니까 객관식 시험에 도가 텄는데, 선생님들의 문제 스타일까지 대충 파악한 나는 중학교 3학년 때의 시험 중 하나에서 전 과목 올백이라는 점수를 받기에 이른다. 선생님들까지도 나한테 독하다고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때는 그게 나의 자부심이었다. 백점과 구십몇점으로 가득 뒤덮여서 등수란에 1이 찍힌 꼬리표를 덜렁덜렁 들고 집에 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였다. 그게 그 시절 내가 이뤄낼 수 있는 가장 큰 성취였으니까.
그 와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미술 시간이었다. 방학 숙제 중에서도 미술 숙제를 제일 좋아했다. 작은 내 방을 꾸미는 일도 나를 들뜨게 하는 일 중 하나였다.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어 내는 것에 시간을 쏟다 보면 새벽이 되도록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친구들은 그런 나에게 편지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여러 선과 도형을 그려서 기꺼이 편지지를 만들어 주었다.
공부도 잘했고 미술도 좋아했던 여자 아이는 자라서 결국 7급 공무원이 되었다. 객관식 시험의 극치인 공무원 시험을 거쳐서. 수많은 시험 끝에 객관식 시험의 정답 같은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무수한 객관식 시험을 치러 오면서 시험에서 가장 올바른 답을 고르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내 인생을 객관식 시험처럼 답 맞추며 살아가는 능력(?)까지 얻게 된 것이었을까. 어쩌면 오엠알 카드의 동그라미를 하나하나 채우며 인생에도 정답이 있다고 세뇌당한 건지도 몰랐다.
객관식 시험은 모조리 잘 보았던 나는 공무원을 그만두기 전까지 인생도 비슷하게 살아왔다. 중학교를 졸업하니까 외고라는 답이 있었고, 외고를 졸업하니까 대학이라는 답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니 1번 취업, 2번 공무원, 3번 결혼, 4번 대학원이라는 보기가 있었다. 나는 바보 같아서 반드시 네 가지 중에 답을 골라야 하는 줄 알았다. 사실 답이라는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걸 알지 못한 채였다.
내가 그냥 객관식 시험을 못 보는 애였다면 내 인생은 조금 달라졌을까. 모든 일이 내가 객관식 시험을 잘 보는 애라서 일어난 일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정답을 골라낼 줄 모르는 애였다면 나는 교과서를 복사한 것처럼 외우는 시간에 미술을 했을지도 모르고, 외고를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미대를 가거나 아예 대학을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끔은 내가 공부를 잘하는 애인 게 원망스럽다. 차라리 다른 걸 잘했으면 싶다. 답이 없고 창조적인 어떤 것. 내가 만약 먼 훗날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가 한국에서 성장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다. 그 아이는 나처럼 답을 정해놓고 살지 않았으면 해서.
아침에 백점 소식을 들은 후 기쁘고 씁쓸한, 한 마디로 복잡한 심경이 된 채로 샤워를 하다가 오랜만에 내가 공무원을 그만둔 이유를 떠올렸다. 결국엔 객관식 시험의 정답 중 하나로 살던 내가 견딜 수 없게 싫어서 공무원을 그만둔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인생을 객관식으로 살려고 마음만 먹으면 정답이 차고 넘친다. 출산, 내 집 마련, 승진... 그런 것들을 잘하고 싶지 않다. 아니, 오히려 알면서도 비껴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와인 시험에서 백점을 맞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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