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 서서 무언가를 부지런히 하고 있으면 이런 내 인생도 꽤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출근하면 보기 싫은 얼굴들을 마주해야 하고, 오늘은 나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가 내일은 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겠고, 아침 일찍 일어나 달리기를 하겠다는 결심은 매일같이 흔들렸지만, 그래도 부엌에 서 있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평온해졌다. 거창한 걸 하지 않아도 되었다. 고요한 주말 아침에 어제 설거지 해 둔 물기 마른 그릇들을 하나하나 들어 올려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 정도면 되었다. 그런 별것 아닌 일을 하고 있으면 내 일상이 아무 문제없이 잘 굴러가고 있구나 하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이런 이유로, 나에게 부엌은 우리집의 중심 뼈대이자 일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공간이었다. 그랬기에 잘 만들어야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요리하는 일이 많은 우리는 커다랗고 널찍한 부엌을 원했지만 15평 빌라에 사는 주제에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요리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우리가 택한 방법은 1) 냉장고를 부엌에 딸린 작은 베란다로 뺀다. 2) 식사하는 식탁은 TV가 없는 대신 공간이 여유로운 거실에 둔다. 3) 좁디좁은 조리대를 보완하기 위해 부엌에 아일랜드 식탁을 둔다. 이렇게 세 가지. 이 세 가지를 염두에 둔 채 싱크대와 상하부장을 직접 디자인하는 것으로 부엌 인테리어가 시작되었다.
| 구상 단계 |
누렇게 뜬 타일은 걷어냈고, 칙칙하고 어두운 색의 싱크대 상하부장도 싹 다 철거했다. 부엌 공간에 착 가라앉은 분위기의 싱크대 상하부장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으니 안 그래도 좁은 부엌이 더 좁아 보였다. 상부장 없는 부엌을 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러면 수납공간이 너무 부족하게 될 것 같아 포기하고, 그 대신 상부장 높이를 짧게 제작하기로 했다. 그 밑에는 기다란 원목 선반을 달기로. 상판과 상하부장까지 전부 원목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러면 돈이 너무 많이 들고 우리가 이 집에 언제까지 살게 될지 몰랐기 때문에 굳이 큰돈을 쓰지는 않기로 했다. 상판은 원목으로, 나머지 부분은 가장 저렴한 MDF 재질로 제작하면 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 터였다. 저렴한 재질이라도 그 위에 우리가 원하는 색상의 페인트를 정성 들여 칠하면 분명 싸구려처럼 보이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 싱크대 원목 상판 제작 |
우선 오프라인 목공소를 몇 군데 가 보기로 했다. 웬만하면 나무의 종류와 고유의 결 등을 내 눈으로 비교 후 결정하고 싶었고, 온라인으로 주문했다가 사이즈가 맞지 않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목공소를 하나둘 방문해 볼수록 윤곽이 잡히긴커녕 자신감만 떨어졌다. 싱크대 상판을 나무로 한다고 하니 다들 얼마나 걱정스럽게 바라보던지. 목공소를 갈 때마다 상판은 원목으로 하지 말라는 잔소리만 듣고 있으니 자꾸 김이 빠졌다. 이럴 바에야 그냥 온라인에서 주문하고 말지.
집이 제주라서 파손 우려도 있고 직접 잰 치수가 혹시라도 맞지 않을까 봐 걱정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상판이 들어갈 부엌 공간의 사이즈와 싱크볼이 설치될 부분의 타공 사이즈를 몇 번이고 줄자로 재확인한 후에야 겨우 주문을 완료했다. 따로 제작할 상하부장과 잘 맞지 않아 돈만 날리게 되는 끔찍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시뮬레이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 MDF 상하부장 제작 및 설치 |
상하부장은 원하는 디자인으로 직접 도면을 그린 후 싱크대 시공 업체를 수소문했다. 사실 업체에 시공을 맡기면 표준 규격으로 나와있는 기성품을 부엌 크기에 맞춰 설치해 주는 것으로 간단하게 끝이 난다. 하지만 우리는 서랍의 폭과 높이, 수납장의 길이, 재질 등 거의 모든 걸 표준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요청했기 때문에 우리와 일하게 될 업체는 고생을 꽤나 하게 될 것이었다.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던 시기에 우리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천사 사장님을 만났다. 그는 지금까지 만났던 인테리어 업자들과는 다르게 우리가 요구한 것들 중 가능한 부분은 최대한 실현해 주려고 애썼으며, 불가능한 부분은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게 아니라 왜 기술적으로 불가능한지 차근차근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주었다. 무엇보다 기존의 틀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우리의 계획을 터무니없다거나 이상하게 보지 않고 “원래 다 그렇게 해요” 같은 꼰대스러운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사장님은 우리 둘만큼이나 자주 현장을 찾았다. 그는 공간에 맞게 MDF를 컷팅하여 상하부장을 만들어 주었으며, 온라인에서 주문한 원목 상판과 선반 설치까지 도와주었다. 하다가 일이 잘 안 풀릴 때에는 나지막하게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내 눈에는 오랜만에 하게 된 까다로운 작업을 꽤나 즐기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매일을 똑같고 반복적인 일만 하던 사장님께 우리의 자그마한 부엌 작업이 즐겁고 뿌듯한 기억으로 남았길 바라본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의 부엌은 결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 MDF 페인트칠 |
MDF는 벽 페인트칠과는 다르게 퍼티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 대신 접착력과 발색을 위해 프라이머는 꼭 발라주어야 했다. 귀찮다고 건너뛰면 색이 잘 나오지 않아 어차피 페인트를 몇 번이나 더 칠하게 되므로 고생하는 건 매한가지다. 그러니 프라이머 작업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 우리는 프라이머는 두 번, 바닐라 빛 페인트는 세 번씩 칠해 주었다. 페인트를 세 번씩이나 칠하려면 엄청나게 큰 용량이 필요한 데다가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두 번째 칠할 때까지는 저렴이 대용량 페인트로 작업하고 최종 작업을 할 때만 질 좋고 가격도 좀 나가는 페인트를 칠해주면 비용이 훨씬 절약된다. 물론 최대한 비슷하거나 같은 색으로. 요즘은 저렴이 페인트들도 상당히 괜찮은 것들이 많지만 직접 비교해 보니 가격이 많이 나갈수록 색이 훨씬 고급스럽고 세련된 건 어쩔 수 없더라. 아, 여기서도 한 겹씩 얹을 때마다 분노의 사포질은 필수다!
집 고치는 일을 시작하고 시간이 꽤 흐르는 동안 연이는 인테리어와 관련된 많은 것들을 직접 할 수 있게 되어서, 부엌 조명과 상하부장 손잡이을 손수 달고 이케아에서 구매한 싱크볼과 수전도 직접 설치했다. 연이가 손을 본 후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두 달 여의 부침 끝에 비로소 부엌이 부엌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투명한 볼 전구와 나무 선반과 바닐라 빛의 상하부장이 있는 이 부엌에서 우리는 함께 먹을 아침을 준비하고 커피를 내리고 설거지를 하게 되겠지. 그리고 내 손으로 만든 부엌에서라면 그 기쁨은 몇 배로 커지겠지. 나는 곧 부엌의 아일랜드 식탁 앞에 서서 샌드위치를 만들며 “내 인생은 이대로도 참 괜찮은 것 같아” 생각하며 안도할 터였다.
인스타그램 @dexy.k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