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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덱시 Nov 20. 2020

퇴사 후 6개월, 요즘 하는 생각들




*공무원 때려치우고 지난 6개월간 도대체 무얼 했는지, 하긴 했는지 혹시나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까 봐 한번 적어봅니다.


#. 6개월간 브런치 꾸준히 연재 -> 언젠가 책을 쓰고 싶다는 바람에는 변함이 없음.
#. 와인 자격증(WSET 1&2) 공부&취득 -> 흥미로웠으나, 이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니다 깨달음.
#. 유튜브에 올린 인테리어 영상으로  수입이 생김 -> 금액은 크지 않지만 내 힘으로 회사 밖에서 돈을 번 기념비적 사건.
#. 클래스101 영어 출판번역 강의 수강 -> 더 흥미가 생겨서 내년에 본격적으로 오프라인 강의 들어볼 예정.
#. 최근 프랑스어 공부 시작 -> 외국어 공부는 역시 재미있음. 프랑스어로 된 책과 영화를 자유롭게 보는 것이 목표.



  혼자서 밥을 해 먹었다. 실로 오랜만에 ‘정성을 들여 차렸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점심밥이었다. 색도 다르고 크기도 각기 다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결의 그릇들과 그 위에 담아진 음식들, 톡톡한 면 매트가 아주 잘 어우러져서 정갈한 밥상이었다. 갓 구운 고등어, 지은 지 얼마 안 된 고슬고슬 잡곡밥, 방금 데운 청국장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났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밥상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상추 위에 고등어 한 점, 쌈장 조금, 밥 한 젓가락을 얹은 후 조심스럽게 상추를 접어서 입안에 크게 넣고 우물거리는데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입안에 있던 것들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쯤 청국장을 한 숟가락 후루룩하니까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이거지 싶었다. 그 순간만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데 그 기분을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단순히 맛이 좋아서 아니라 나한테 잘해주는 느낌이 들어서다. 냉동실에 얼려 두었던 남은 피자를 대충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주워 먹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뿌듯함이다. 오늘 식사에 어울릴 법한 접시와 그릇을 고심해서 고르고, 좋아하는 테이블 매트를 한 장 깔아주면 그것만으로도 나 자신에게 정성을 쏟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절망과 무기력이 밥 한 술을 우물거리는 걸로 날아가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특별히 맛있지도 않은 끼니 한 번에 진짜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것만으로도 꽤 괜찮은데, 얼마나 더 잘 되어 보자고 단 한순간도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을까.









  공무원을 그만둔 지 6개월이 지났다. 그만둔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반년이 지나는 내내 ‘빨리 다른 분야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생활했다. 출근만 안 한다 뿐이지 얼른 무언가 이뤄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조급하고 초조한 건 회사에 다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30년을 무언가가 되어보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는데 난 또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에서 바뀐 것 하나 없이. 외고 입학,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 합격, 대기업 취업, 7급 공무원. 평생을 무언가 바라보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러지 않으려고 직장을 그만둔 것이 무색하게 또 그러고 있었다.


  이효리는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다. 언젠가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성취와 타인의 인정을 먹고사는 속물적인 사람이라 평생 아무도 아닌 상태로 살다가는 화병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사라는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라면 잠시 동안 ‘아무나’ 되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정성 들인 밥상을 차려줄 수만 있다면.







  조금 느슨하게 풀린 상태로 어떤 사람이 되면 좋을지 고민해 보려고 그만둠을 택했는데, 뭘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자꾸 무언가를 해야 된다는 압박이 있다 보니 스트레스만 받았다. 계획은 잔뜩 세워두고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나 스스로 납득이 가지 않아서 무기력하게 낮잠을 두 번씩 자고 넷플릭스만 보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한심하면서도 계속 그랬다. 무기력에서 헤어 나와 보려는 시도로 한 달간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일기도 써 보고 하고 싶은 것도 써 보고 달리기도 해 보고 갖가지 시도를 했지만 또다시 도돌이표였다. 새벽 6시에 일어나려는 시도마저, 내가 왜 일찍 일어나야 하는지 스스로를 이해시킬 수 없어서 한 달을 겨우 채우고 끝이 났다.


  연이는 내가 나중에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면 자기도 회사 그만두고 하고 싶은 거 다할 테니, 조급해하지 말고 일단 쉬어보라고 했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회사에 다니지 않는 프리랜서가 되어보겠다고 어렵게 된 공무원을 그만두었는데, 결국은 밥만 축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자꾸 불안하고 연이에게 미안해졌지만 마음과는 정반대로 몸은 점점 더 말을 안 들었다. 어떤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인기도 많아지고, 책도 내고, 팔로워도 많고, 꾸준히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는데 나는 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가. 남과 비교하면서 나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 내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게 생각하고 싫어하는 일인데 끊임없이 자기 것을 생산해 내는 사람들을 볼 때면 속절없이 무너졌다. ‘비교‘까지 나를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그 잘 차린 밥’을 먹다가 우선 다 잊은 채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쩌면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생각이 먼저였고 그것에 대한 실천으로 밥을 정성 들여 차렸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려는 생각, 이루어 보려는 생각, 돈을 벌어 보려는 생각 전부 버리고 당분간은 그저 세상에 존재해 보자. 나에게 제대로 된 밥상을 차려주고, 내 몸을 구석구석 움직이자. 그것이 내가 벼랑 끝에서 찾은 방법이다. 어쩌면 마음대로 풀리지 않아서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동시에 도망이면 또 어떤가 싶다.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두려워 도망조차 가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보단 낫다.


  브런치 연재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다. 요즘 내 안에 온갖 생각과 감정들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중인데 나 스스로도 혼돈인 상태에서 읽을 만한 글을 쓰는 것이 무리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좋은 글은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재 소용돌이치는 내 안의 격정적인 것들을 공개된 플랫폼에 투명하게 내어 놓았다가는 오히려 독자들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도 들었다. 현재의 혼돈과 고민은 가깝거나 먼 미래에 내 마음이 평온을 되찾았을 때 담담히 써 내려가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브런치 연재를 잠시 멈추기로 했다. 한 번 시작한 김에 성공의 맛(?)을 조금이라고 보고 싶었고, 이제 와서 멈추면 포기 같아 망설여졌지만 고민 끝에 그러기로 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한 걸음 후퇴로 너그러이 생각해 주시길 바란다. 꼭 돌아올 테니.


  더불어 400명을 갓 넘은 나의 소중한 구독자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나에게 브런치 구독자 분들은 다른 소셜의 팔로워보다도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아마 퇴사 후 내 첫 창작물에 대한 공감의 표시라서 그런 것 같다. 부족한 글인데도 꾸준히 읽어주신 분들 덕에 어떤 글은 조회수가 10만 가까이 되었고, 나는 계속 글을 쓸 용기가 났다.


  

유난히 답답하고 시린 올해 겨울이지만, 그런 만큼 곁에 있어 주는 사람들과 함께 따스하고 반짝이는 연말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다른 주제로 내년에 다시 찾아올게요. 꼭 다시 만나요.







인스타그램 @dexy.k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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