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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덱시 Nov 22. 2022

intro. 나의 행복이 소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돈으로 자유를 사고 싶은 자의 탐욕스러운 고백


  얼마 전 출판사와 미팅을 했다. 나는 시간을 잘못 계산해 40분이나 일찍 약속 장소인 미술관 1층 카페에 도착했다. 온통 하얗게 칠해진 페인트 벽에는 미술관 카페답게 내게는 생소한 그림과 사진들이 불규칙적으로 프린팅 되어 있었다. 카페 겸 레스토랑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기분 좋은 분주함. 웨이터들은 검은색 셔츠를 입은 채 종종걸음을 치며 음식을 서빙했다. 층고가 높은 공간에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 사람들이 대화 나누는 소리가 적당히 울려서 순간적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다가오길 기다리며 페퍼민트 티를 마시고 있자니 긴장이 풀리기는커녕 갈수록 얼굴 근육이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생애 첫 미팅이 시작되면 곧 출간 계약을 하느냐 마느냐가 정해질 터였다.


  약속 시간은 3시 반. 계절이 늦가을로 접어들며 벌써 해가 많이 짧아졌고,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해가 카페 유리창으로 비스듬히 비추었다.


  메일만 주고받다가 마침내 얼굴을 마주한 대표님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더듬거리는 나를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려주셨다. 내가 만든 창작물들을 사랑이 담긴 시선으로 보아주는 사람과의 만남은 그날 유리창으로 비추던 햇살만큼이나 다정하고 포근했다. 애초부터 이번 미팅에서 어떻게든 대표님을 홀려서 출간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겠다는 흑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부터 시작하는, 도화지처럼 하얀 마음이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이건 엄청난 사건이야. 난 그걸로도 만족해. 이제 열심히 준비할 일만 남았어.’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막연하게 책을 쓰고는 싶었지만 내가 책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것부터 정리하고 싶었다. 내 앞에 나를 지탱하는 어떤 것들이 놓여있긴 한데 주위가 안개로 가득해서 보이다 말다 했다. 동굴을 파고 들어가든, 책을 읽든, 일기를 쓰든 어떻게든 이 안개를 걷어내야 했다. 안개를 걷어버리고 나면 나에게 무엇이 남을지 궁금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출간 계약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거의 없었으면서도 내가 미팅에 나간 이유는 ‘안개를 걷는’ 그 일을 하기 위한 확실한 계기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인 듯하다. 책 계약을 하지 않고도 매일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와 약속을 하지 않고도 글쓰기에 진지해지고 싶었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책을 쓸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것 같았다. 우리가 만났을 때,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고민을 시작하던 참이었고, 출판사 대표님 역시 내 책만이 가지게 될 특별함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계셨다. 결국은 둘 다 같은 이야기. 섣부르게 책을 냈다가는 그저 그런 에세이류 책으로 묻히게 될 게 뻔한데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할 거면 보란 듯이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당장 계약서를 쓰지 않기로 했다.



- 준비되면 꼭 연락드릴게요. 근데 준비됐다고 느끼는 날이 오긴 할까요?

- 준비됐다고 느낄 때 말고 쓰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을 때, 꼭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알려주세요.



  그렇다. 준비를 완벽하게 마치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 어떻게든 해내야겠다는 결심과 용기 있는 시작만이 있을 뿐.









미팅에서 대표님이 책 컨셉 중 하나로 말씀하신 ‘소확행’이라는 단어는 그날 이후 내 머릿속을 떠날 줄을 몰랐다.



“덱시님 브런치 글이나 유튜브 콘텐츠를 봤을 때 책 컨셉으로 할만한 게 ‘소확행’이 있는데 그런 책은 너무 많아요. 덱시님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찾아야 해요.”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지만 속으로는 ‘내가 과연 소소한 행복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인가?’하는 의심이 들었다. 적어도 2-3년 전의 나는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잘 되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고, 좋아하는 옷을 질리도록 사고 싶다. 제주의 비싼 땅을 사서 숲이 보이는 뒤뜰과 통창이 있는 큰집을 짓고 살고 싶다. 떠나고 싶을 때는 언제 어디로든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러니까, 나는 적어도 자유로울 수 있을 만큼은 풍요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내가 과연 소확행과 어울리는 사람일까? 갑자기 내가 속물처럼 느껴져서 “사실 저는 소확행으로 만족하지 못해요. 저는 제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로 성공하고 싶고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나는 요리를 하고, 산책을 하고, 일기를 쓰고, 싸구려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작은 일상에서 누구보다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지만 소확행이 열심히 살지 않는 것에 대한 셀프 위로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현재에 안주하기 위한 비겁한 변명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그가 글을 쓰는 본업에 열심이고, 심신이 건강하고, 부유한데도 ”이런 평범한 옷과 자전거, 시계만 있으면 돼요. 알아보는 사람 없이 도시를 활보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니까 이 정도로 충분해.’라며 소확행이라는 미명 아래 내 가능성에 선을 긋고 싶지 않다. 나에겐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글 쓰고 번역하고 영상을 만들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꿈이 있으니까. 이유 없이 끌리는 화이트 와인을 가격표도 보지 않고 덥석 집어 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그렇게 되려면 열심히 사는 것밖에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나는 내가 자연 속에 더 많이 머무르고, 몸을 많이 움직여 심신을 단련하고, 세상의 훌륭한 책과 영상들로부터 영감을 받고, 나만의 영상과 글을 끊임없이 생산한 대가로 ‘필연적으로’ 잘 됐으면 좋겠다. 우연히 잘 되는 것은 싫다. 내가 이룰 성공이 티 없이 정직하길 바란다.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를 꿈꾸지만, 그 말이 아무것도 아닌 지금의 나를 사랑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의 내가 0이든, 10이든, 100이든 나를 사랑하는 일을 절대 멈추고 싶지는 않다. 0인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100인 나를 사랑할 수는 없을 테니. 그러니 내게 소확행이란 더 나은 꿈을 꾸면서도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기 위한 자세 정도가 되겠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은 욕망 덩어리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계속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보려 한다. 여름밤 겨울밤 할 것 없이 싸구려 화이트 와인을 홀짝이는 내 모습을 사랑하면서.










+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2년이 지났네요. 반성합니다. 블로그에는 종종 가벼운 글들을 올리기도 했지만 브런치를 다시 시작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어요. 브런치는 글이 중심인 플랫폼이다 보니 제대로 된 글 한 편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거든요. 이번 글에 에피소드로 등장한 <출판사와의 미팅>이 제가 브런치를 다시 시작하도록 유익한 자극이 되어주었습니다. 실제로 미팅하는 모습을 담은 유튜브 영상도 있으니 혹시 궁금하신 분은 제 유튜브 채널로 놀러 오세요.(아래 링크) 언제나 그렇듯 별다른 대책이나 계획 없이 일단 시작하고 봅니다. 일단 이 매거진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올려볼 작정이에요. :)





https://youtu.be/wEE6lR3jC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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