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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 화엉 Dec 19. 2023

나는 어떤 서사의 일부일까

2023년의 읽기의 일기 결산

2023년 올 해의 책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비 딕>, <슬픔의 방문>
나를 형성하는 생물학적, 문학적, 사회학적 서사
점에서 선으로 또 면으로, 결국에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연대



2023년을 마무리한다.


12년 동안 Google Spreadsheet에 책 읽은 목록을 정리해둔 것의 장점은 여럿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같은 책을 예전에는 어떻게 읽었고 지금은 또 어떻게 다르게 읽었을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렇다. 2015년 9월, 그러니까 내가 서른 한 살이었을 때 나는 출간한지 5년 이상 지난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그제서야 처음 읽었다. 베스트셀러는 읽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을 지키던 때라 아무도 그 책을 주목하지 않을 때에야 간신히 책을 집어들 용기가 난 셈인데, 퍽 재미있게 읽었던 모양이다. 책을 읽고 "정의를 고민하는 고난도의 지적 유희. 처음 읽었는데 좋았다." 라는 한 줄 평을 남겼는데, 서른 하나의 나는 이 책을 정의(正義)의 정의(定義) 측면에서 읽었던 듯 싶다. 그 이상의 의미를 떠올리기에 서른 하나는 조금 어리다는 생각을, 지금 하게 된다.


같은 책을 2023년 10월, 그러니까 내가 서른 아홉일 때 다시 읽었다. 미국으로 MBA 연수를 오고 나서 공부도, 생활도 익숙해지고나니 책이 그리워지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지고 온 책 중에서 몇 권 다시 읽어보기로 했는데 그중 하나였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학교에 나가지 않던 때라 시간이 많았는지 400쪽 분량을 이틀에 걸쳐 읽었는데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이며, 어떤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남길까" 라는 평을 남겼다. 내가 주목한 단어는 이야기라고 풀어쓴 단어, 달리 말하면 사람의 서사에 대한 것이었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개인은 공동체의 일부 속에서 생존했고 성장했고 또 미래에도 그렇게 연결될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듯 했다. 개인을 공동체의 일부로 환원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를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고 그렇다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정의의 요체였다.


사람의 서사, 공동체, 환경. 이런 단어들을 생각하니 어떤 이미지가 머리 속에 떠오르게 된다. 한 사람이 길 위에 서 있다. 우리는 부감으로 그 사람을 위에서 보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이 서 있는 땅에는 아주 많은 갈래의 파스텔 풍의 길이 그려져 있다. 어떤 길은 저 멀리서 시작되어 다시 저 멀리로 이어지는데 바로 그 길 가운데에 그 사람이 서 있는 셈이다. 그 길은 <생물학적 서사>라고 부를 법하다. 다른 길도 있다. 다른 길은 아까 <생물학적 서사> 라고 쓰여진 길과는 다른 방향에서 시작되어 또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사회학적 서사>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생물학적 서사, 사회학적 서사, 문학적 서사 ...... 우리의 몸은 분명 하나인데 우리의 몸이 놓여진 환경은, 맥락은, 서사는 너무나 많은 길과 레이어가 교차되어 형성된다. 하나의 서사가 아닌 것인데 또 달리 생각해보면 수 많은 서사가 내게로 결집되어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나의 서사는 다중적이고 복합적이고, 무엇보다 단선적이지 않고 일련의 흐름 위에 있다. 정현종 시인이 옳았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정현종




생물학적, 문학적, 사회학적 서사


그러므로 <정의란 무엇인가>를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닌 내 인생의 서사로 읽어보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 그렇다면 현재의 나를 조각하고 있는 여러 서사들의 레이어는 과연 무엇일까...... 로 생각이 이어진 점은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생물학적 서사에서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진화론에 대한 책을 여럿 읽었다. 진화론에 대해 잘 몰랐으니 리처드 도킨스의 책부터 시작했고, 한 권의 책이 끝나갈 무렵 이 다음에 읽어야 할 또는 읽고 싶은 책이 저절로 다가왔다. 진화론, 진화론을 거부하는 인간의 태도와 행위, 다양성, 사회학적 다양성의 의미, 차별과 억압, 이런 주제로 13권의 책을 읽었다. 10월과 11월의 독서는 생물학에서 시작해서 인문학으로 끝났고 그 이전의 나와는 조금은 더 진화한 내 자신이 느껴졌다. 아니, 진화라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다. 다윈이 이야기한 것처럼 변화를 수반한 유전이라고 해두자.


생물학적 서사에 이어 나는 문학적 서사로 나를 다시 이해하고 싶었다. 사실 이건 2018년 본격적으로 고전 문학을 읽고 난 이후에 매 번 경험하는 것인데, 아주 쉽게 말하자면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많이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 비슷하게 살아간다는 점이다. 사랑, 죽음, 고통, 고난, 성장. 사람의 삶은 이런 몇 안 되는 키워드로 결국 귀결된다고 믿게 되었고 바로 그점 때문에 고전문학이 죽지 않고 생명력을 얻었다고 여겼다. 달리 말하면 고전문학이라는 것은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그걸 보여주는 작품이었던 거다. 때문에 고전문학을 읽고 있다보면 나는 놀라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경험하고 했다. 100년, 200년 전 문학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근래에 쓰여진 것 같은 생동감이 고전 문학 속에 살아숨쉬는 것을 보며 놀라웠고, 동시에 나라는 존재가 그런 몇 개의 키워드로 정의될 수 있고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군상 중 하나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특별히 안주할 것도 없지만 또 특별히 차별화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다르게 살아간다고 보여진 사람조차 결국 돌아보면 타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내가 평범하다는 점이 좋았다.


그래서 4년 만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다시 읽고 이어 <주홍 글자>와 <모비 딕>을 12월 첫 2주 동안 읽었다. 허멀 멜빌의 <모비 딕>을 읽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전문학을 읽기 전과 읽은 후에는 언제나 비슷한 감정을 놀랍게도 되풀이하게 된다. 처음 <모비 딕>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진부한 클리셰처럼 느껴졌고 그 안에 생명력이 과연 있을까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콜 미 이슈마엘, 로 시작하는 책을 펼치고 에이해브 선장, 스타벅 항해사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나의 의심은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 역시 똑같이 느꼈다.  "다시 한 번 느낀다. 구식이지 않겠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아마도 문학적 서사를 읽어내려가며 똑같은 의심과 경이로움을 매 번 느낄 것 같다. 똑같이 이 작품의 생명력에 대해 의심할 것이지만, 똑같이 고전문학이 사람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것의 경이로움을 어김없이 느낄 것이다.


나의 몸은 하나이되 이를 구성하는 레이어는 여럿이고 각 레이어는 저 편에서부터 시작되어 다시 저 편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은 사회학적 존재로서의 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했다. 12월 하순에는 의사 이기병의 <연결된 고통>, 시사in 기자 장일호의 <슬픔의 방문>, 그리고 인류학자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 등을 이어 읽었다. 이 책들은 문학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인문학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사회학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같은 점을 말하는 듯 했다. 바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건강하고 아픈 증상이 맞물리며 나타나기도 하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선명한, 고정된 경계는 없기 때문에 늘 경계를 넘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깊이 공감했다. 경계를 사이로 각자의 처지와 진영이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경계를 넘을 용기는 타인을 이해하고 연대하는 공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작가 은유가 경향신문 지면에서 밝힌 것처럼,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나의 몸은 타자들의 그것과 분리될 수도, 격리될 수도 없는 것이다. 나의 몸은 관계들 속에서 비로소 내 것이기도 한" 것이다.




점, 선, 면의 生


나의 서사는 점이 아니라 사건의 지평선 저쪽에서부터 시작되어 반대편으로 뻗어나가는 선에 가까웠다. 생물학적, 문학적, 사회학적 선이 내 발 밑에서 교차하며 현재의 나를 형성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나의 선은 곧 너의 선이기도 했고 나는 밟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선 위에 시간이 지나 발을 옮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나의 선과 너의 선은 자주 일치했고 때로 섞였다. 선과 선이 만날 때 나의 서사는 면에 가깝게 변해갔다.


아, 면으로 변해버린 나의 서사 위에서 결국 나는 내가 읽어나가는 책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이해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끊임없이 진화해서 현재에 이르렀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종으로 변화해나갈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생각. 우리는 결국 비슷하게 태어나 비슷하게 사랑, 고통, 희망, 좌절 등을 경험하다가 비슷하게 죽어갈 것이기 때문에 내가 너와 다르다, 너의 생각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생각. 브래디 미카코의 말처럼 때로는 타인에게 나의 신발을 내어주고 타인의 신발을 내가 신어보며 내가 몰랐던 타인의 서사를 경험하고 연대하고 공감하자는 생각. 우리는 어떤 서사 속에서 살아가며 어떤 이야기를 미래 세대에 남길 것인지를 고민하는 힘을 배워보자는 생각. 


이 생각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 이 생각들을 떠올릴 때 비로소 나는 조금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닌 것이다.


30대가 저물어간다. 서른 하나에 점이었던 나는 서른 아홉에 어느 정도로 넓은 면이 되었던가. 또 서른 아홉의 면은 마흔 아홉이 되어 돌아봤을 때 얼마나 작은 점에 불과했던가. 나는 꽤나 자주 그런 것을 떠올리며, 의심하며, 흔들리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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