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에 마흔 살이 되었고, 1월에 새로운 학기가 시작했고, 그 중에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늘 "올 해가 책을 온전하게 읽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거야..." 라는 긴장을 하는데 계속해서 그 마지막 시간은 한 해 한 해 뒤로 유예되고 있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좋은 책을 어떻게 찾아내서 읽고 그 내용을 기억하고 증언할 것인가? 이 부분은 늘 어려운 일이고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데요. 2024년에는 몇 가지 작은 단서에 의지해서 좋은 책을 만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먼저 제가 좋아하는 로쟈(이현우)님의 알라딘 블로그를 많이 엿보는데, 올 해는 <로쟈와 함께 읽는......> 이 시리즈를 저 혼자 잘 따라가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월에는 여러 책을 읽었고 이런 키워드에 제가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 같습니다.
- 사람은 왜 이야기에 끌릴까?
- 체코, 헝가리와 같은 중부 유럽의 문학은 어떤 매력이 있을까?
그렇게 해서 1월에 읽은 23권의 책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 2권은요.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18145333
책 블로거 ‘지상의 다락방’ 님이 2023년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책으로 이 책을 이야기해서 읽게 되었는데, 나에게도 어쩌면 2024년 읽은 가장 인상적인 책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11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1월에는 계속해서 이야기, 서사, 문학의 기원, 책의 미래 등에 대한 주제로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은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그리스와 로마를 배경으로 책, 정확히는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인류의 욕망, 분투, 좌절 등을 그리고 있는데 형태만 다르게 될 뿐이지 인류의 이러한 노력은 미래에도 계속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투영시켜 온 점이 작가의 글 여기저기서 묻어난다. 560 페이지 분량의 책이 낯설지 않게 읽혔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82321640
예스24에서 발행하는 [책읽아웃] 도어 편을 함께 들으며 이 책을 읽었다. 황정은 작가가 진행한 [책읽아웃]의 제목은 “이 인물이 문학 속에서 오래 기억되었으면” 이었는데, 여기서의 인물은 소설 도어 속 에메렌츠라는 여성일 수도 있고 혹은 이 소설을 집필한 작가 서브 머그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메렌츠라는 캐릭터는 너무나 생생하고 압도적이었고, 인물과 서사를 밀도있고 우아하게 기술한 작가 역시 대단히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의미로 올 해의 책 후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동시에 이 책을 타인에게 권하는 것 역시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내게 다가온 밀도 높은 감동이(이것을 감동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니면 묵직한 충격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지루한 어려움으로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고, 그들의 지루한 어려움을 목격하는 나의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나 혼자 나의 감정을 간직하고 증언하며 그것을 곱씹고 싶을 때가 있다.
입니다.
1월
001. 1/1 자미라 엘 우아실 등,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김현정 역, 원더박스
내가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뒤늦게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조금 늦더라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와 서사를 알게 되는 거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창조해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남의 이야기를 읽는 인간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인간으로 진화하는 거다. 내가 왜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지, 왜 문학 서평을 모아 놓은 책을 가까이하지 않았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문학 서평에는 무언가를 관통하는 서사(내러티브)도 인과와 상관을 조합한 스토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과 사유만이 존재했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거다.
002. 1/2 김상욱, <떨림과 울림>, 동아시아
몇 년 전 이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다 읽지 못하고 덮었고 이번에는 끝내 읽었다. 서문을 제외하면 그다지 인상적인 내용은 없었는데 달리 말하면 서문에서 제시한 <우주는 떨림이다> 라는 인트로만큼은 훌륭했다. 과학자들 역시 과학의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고 서사를 구축한다. 과학의 언어로 서사를 만드는 것, 그 서사를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분절된 동굴에서 더 많은 지식과 감각이 넓은 광야의 시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려는 마음가짐. 그 마음가짐만큼은 쉽게 폄하할 수 없다.
003. 1/2 린 틸먼, <어머니를 돌보다>, 돌베개
이 책을 다 읽고나서 TED에서 작가 Lidia Yuknavitch가 발표한 영상을 찾아보았다. 작가의 영상은 “Your story deserves to be heard, I would be listening” 이렇게 끝이 나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객관적이고 관조적인 시선, 그리고 서늘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죽음의 경과 속에서 도출된 작가의 감정은 여지없이 고전 물리학이라기 보다는 역동적인 양자역학에 가까웠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고전문학에 푹 빠져있었는데, 조금은 자신의 온 몸과 생으로 서사를 들려주려는 현대 작가에 대해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다. 결국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오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004. 1/3 한병철, <서사의 위기>, 다산초당
서사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은 서사가 위기에 봉착해서는 안 된다, 서사가 위기에 봉착한 현상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을 내재한다. 책의 상당한 부분에 감응하고 공명하며 읽었다.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이며 분절된 현재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책을 읽고 나서 2016년에 발행했던 독립잡지 <월간 그런사람> 창간호의 서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2016년부터 2019년 정도까지 작성했던 글은 지금 읽어도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잘 쓴 글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때 글을 쓰던 마음이나 지금 나의 마음이나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거다. 그렇다면 그 글만큼은 나의 서사라고 부를 수 있다.
005. 1/4 탕누어, <명예, 부, 권력에 관한 사색>, 글항아리
‘시늉’이라는 단어는 맹자의 “오랫동안 빌려 돌려주지 않으면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님을 어떻게 알겠는가?” 라는 관점과 연관이 있다. 보르헤스는 말하길, 남을 흉내 내 시를 낭송하려면 그 사람의 말투, 억양, 제스처를 따라해야 하는데 그것은 사실 그가 느끼는 방식 안에 들어가려는 시도라고 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서경식이 언급한 지성과 교양이라는 것을 떠올렸고, 지성과 교양을 옹호하는 것이 곧 인간을 옹호하는 것과 같다는 말을 떠올렸다. 인간을 옹호한다는 표현은 이 책에서도 반복되었다. 지성인을 시늉하는 것이 독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의무다. 그 시늉을 통해 언젠가 나도 모르게 지성과 교양을 옹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채.
006. 1/5 서경식, <시의 힘>, 현암사
지성인까지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판별과 선택을 할 수 있는, 하겠다는 교양인으로는 성장하자는 가르침을 그에게서 얻은 것이 어느 새 10년 전이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이후 그가 한국에서 펴낸 모든 책을 다 찾아서 읽었는데 사상, 작문, 독서 어느 측면에서도 그는 나의 전범(典範)이다. 어쩌면 지난 10년의 독서 경험은 제2의 서경식을 찾아 나서려는 나의 분투라고 요약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다. 이 책을 대만의 탕누어 작가의 책과 연달아서 읽으니 마흔이 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최소한 꾸준히 무엇을 해야 할 지 계속해서 잊지 않게 된다. 2023년 말 돌아가신 서경식 작가를 다시 한번 추모한다.
007. 1/5 실라 피츠배트릭, <아주 짧은 소련사>, 롤러코스터
레닌부터 푸틴까지의 역사를 읽어보며 머리 속에 계속 맴도는 질문은 “과연 이것은 실패한 실험인가?” 라는 점이다. 실패인지 성공인지, 혹은 실험인지 아닌지 그 어느 단어도 쉽게 단언하거나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현우(로쟈) 작가의 다른 책을 읽다가 발견한 부분인데 ‘비록 실패로 끝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역사의 뒤안길로 용도폐기 할 수는 없는 점이다. 그것은 실패 또는 성공이라는 시도보다도 후퇴한 것이다’ 라는 대목은 이 책과 함께 곱씹어 볼만하다. 적어도 마르크스와 레닌이 꿈꾼 볼셰비키 혁명이라는 것은 절박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모든 것이 그렇듯, 한 번 시작된 것은 그 이후에는 통제되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이되어 나가는 것이다. 변이된 결과만을 가지고, 그 시작의 이유와 의미를 간단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008. 1/7 존 서덜랜드, <문학의 역사>, 소소의 책
2024년 로쟈의 강제독서 시리즈의 마지막 책이다. 전체 문학이 아니라 (물론 그렇게 범주를 넓힐 수는 없겠지만) 영어로 쓰여진 영국 문학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은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어떻게 태동되어 진화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는 점은 즐거웠다.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최근 30,40년 사이에 등장한 나름의 현대 문학작품에도 시선을 돌려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소소의 책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역사 시리즈는 주제에 따라 알맞게 선택해서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표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문학에 관한 한 우리는 치즈 속의 구더기들이다” 책을 읽는 우리 모두가 가까스로 이 책, 이 다음의 책을 선택해서 그렇게 자신만의 좁은 통로를 만들어 나갈 뿐이다. 그 애절한 선택이 우리 삶과 서사를 만들어 나가는 분투인 것이다.
009. 1/9 이레네 바예호, <갈대 속의 영원>, 반비
책 블로거 ‘지상의 다락방’ 님이 2023년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책으로 이 책을 이야기해서 읽게 되었는데, 나에게도 어쩌면 2024년 읽은 가장 인상적인 책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11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1월에는 계속해서 이야기, 서사, 문학의 기원, 책의 미래 등에 대한 주제로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은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그리스와 로마를 배경으로 책, 정확히는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인류의 욕망, 분투, 좌절 등을 그리고 있는데 형태만 다르게 될 뿐이지 인류의 이러한 노력은 미래에도 계속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투영시켜 온 점이 작가의 글 여기저기서 묻어난다. 560 페이지 분량의 책이 낯설지 않게 읽혔다.
010. 1/12 이현우, <책을 읽을 자유>, 현암사
언제나 많은 영감과 함께, 저렇게 방대하고 다양한 책을 과연 어떻게 기억하고, 선별하고, 연결시켜서 읽는 것일까? 독자로 하여금 애교 섞인 의심을(?!) 갖게 하는 로쟈 이현우 작가가 약 15년 전에 펴낸 책이다. 원래 이렇게 짧은 글을 책으로 모으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은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책 후반부에 지젝, 데리다, 라캉과 같이 20세기 철학가들이 등장하는 대목은 조금 집중도가 떨어졌는데 그건 아마 그 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나의 몫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는데, 1) 몰라도 글을 읽게 만드는 이현우 작가의 힘, 2) 언젠가는 지젝과 라캉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다는 나의 욕망, 이 둘이 결합되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독자로서 아니 그냥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마흔 남짓 살아온 나에게 큰 울림을 준 네 사람들이 있다면 서경식(인문), 이현우(문학), 이진경(철학), 신준형(예술). 이렇게 네 명을 기억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011. 장정일/한영인,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안온북스
이현우 작가의 <책을 읽을 자유>를 읽다 보니, 장정일 작가에 대한 이현우 작가의 애정이 느껴져서 장정일 작가의 생각을 조금 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아주 예전에 장정일의 <공부>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났고 (약 10년 전에) 그때는 지금과 달리 별다른 서평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고민하는 스스로의 학습을 주제로 하는 다수의 책 중에서도 발군이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작가와 평론가의 입장에서 서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좋았고, 이렇게 일대일로 서신 형식으로 글을 오고 가는 것이 필연적으로 실패한 텍스트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는데 이 책은 그나마 중간 정도는 유지했던 것 같다. 장정일의 글을 좀 더 읽어보고 싶다.
012/013/014. 프란츠 카프카, <변신>/<소송>/<성>, 열린책들
카프카는 어렵다. 카프카는 모호하다. 카프카는 우울하다. 카프카는 어둡다. 카프카는 기괴하다. 카프카는 그 무엇이 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아무것도 아니다 …… 카프카는 거대한 신화와 같았다. 그 때문에 2023년 여름 미국으로 오기 몇 달 전에 창비에서 펴낸 <성>을 구입해서 한참 서가에 꽂아 두었는데 결국 읽지 않았고 내가 이 책을 미국에 가져가면 읽을 것인가? 잠시 고민했지만 그럴 것 같지 않아서 다시 중고시장에 판매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프란츠 카프카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잘 몰랐고 또 읽는다 하더라도 그의 말년 작품 중 하나인 <성>부터 도전하려 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실패가 예고된 독서 시도였다. 카프카의 글을 읽다 보면 재미있고, 현대적이고, 연극적이고, 밀도가 높고, 무엇보다 이 작가가 나와 결이 맞다고 느끼게끔 만든다. 그에 대한 선입견 섞인 해석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의 저작들을 읽은 것은 아주 좋았다. 카프카를 시작으로 중부와 동유럽 문학의 세계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015. 박홍규,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푸른들녘
이 책의 저자인 박홍규 교수는 기존의 해석과 관념을 뒤집고 카프카를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는(박홍규 교수) 문학에 전문이 아닌 비 전문가이기 때문에 카프카를 연구하지 않고 그저 그를 친구로서 좋아할 수 있고, 이해하기 보다 껴안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를 작가로서 좋아할 수 있다는 점은 가장 중요하게 들렸다. 무엇보다 카프카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척 즐거웠고 현대적이라고 느꼈다. 어둡거나 기괴하지 않았다. 카프카는 아마 스스로 웃으면서 <변신>이니 <소송>이니 <성>이니 ...... 자신의 텍스트를 진심으로 즐겼을 것이다. 박홍규 교수의 독창적인 사유와 솔직한 문체는 좋았다. 다만 작가로서의 역량에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016. 조너선 갓셜,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위즈덤하우스
인간은 왜 서사에 매력을 느끼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문학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얻고 싶어서 1월에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서사의 위기>, <문학의 역사>, <갈대 속의 영원> 등의 책을 연속하여 읽었고 이 책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사람의 어떤 특징을 호모 무엇으로 정의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놀랍지는 않지만 책마다 강조하는 점은 조금씩 다르다고 여겨진다. 이 책은 서사가 어떻게 잘못 활용되면 사람들을 선동할 수 있는지에 대해 미국 최초의 픽션적 대통령마저 소재로 하며 들려주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이 서사의 본질 아닌가 싶다. 잘못 활용된 서사라는 것은 없다는 것. 누구나 각자의 도덕적 신념을 바탕으로 각자의 서사를 만들거나 믿는 것인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늘 다른 서사의 가능성에 대해 인정하고, 상상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결론은 독자로서 나의 몫이었다.
017. 이현우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
로쟈 이현우 선생의 두 번째 책이다. 더듬어보니 2024년의 두 번째이고 기록을 찾아보니 사실 2012년부터 이 분의 책을 몇 권 꾸준히 읽어왔던 모양이다. 어쩌면 전작 <책을 읽을 자유>보다 조금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는데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소개하는 책은 조금 덜 치열해졌고, 그가 쓰는 서평으로서의 글은 조금 더 정치해졌고, 마지막으로 책 말미에 실린 발문이 인상적이었다. 전작에 실린 신형철 평론가의 발문도 물론 인상적이었지만 (로쟈는 기계가 아니라는 점), 이번에 실린 금정연 서평가의 발문은 그 자체로 완성도 높은 에세이이자 로쟈에게 헌사하는 아름다운 발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우 작가가 이야기하는 중간 인문학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러니까 너무 속물로서 접근되는 형이학적인 인문학도 아니며 너무 고고한 형이상학적인 인문학도 아닌 그 사이의 중간 인문학은 분명 그것을 원하는 독자들의 수요가 있고, 무엇보다 그것을 제공하는 역할을 분담할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 점은 독자로서의 나에게도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게 한다.
018. 다카쿠와 가즈미, <철학으로 저항하다>, 사계절
온라인 북클럽 사이트인 ‘그믐’이라는 공간을 처음 경험해보면서 같이 읽기의 한 갈래로 이 책을 선정해서 읽게 되었다. 철학은 철학사와 다르기 때문에 철학의 역사, 철학자의 계보를 공부하는 것이 철학을 공부하는 것과는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접근은 당연한 것인데도 잊고 있던 무언가를 일깨워주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철학이라는 것은 하나의 현상을 두고 서로 다른 개념으로 그 현상을 포획하고 해석하고 전달하려는 노력의 분투, 전투,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매번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개념으로 이 현상을 이해할 것인지 사람들마다 그 프레임은 저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나의 사상에 가장 근접한, 혹은 내가 가장 근접한 개념을 들려준 철학자는 과연 누구일까? 현재로서는 라캉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019. 백상현,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책세상
2015년에 이 책을 읽고 나서 근 10년만에 다시 읽었다. 전작인 <철학으로 저항하다>와 연계해서 읽으면 그 의미가 좀 더 되살아 난다고 생각하는데, 결국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진리라고 믿는 개념들을 얼마나 손쉽게 전복할 용기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안락하게 의자에 앉아 스크린에 투사된 영상을 즐길 것인지 아니면 그 스크린 너머로 등장한 유령의 이미지를 보면서 그 너머에 있는 허무와 공백의 진리를 상상하고 접근하려고 하는 용기를 가질 것인지? 다만 저자가 예시로 드는 다양한 예술 작품 사례가 정말 유령 이미지를 현실로 소환하려고 했던 시도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 든다. 때문에 책이 끝으로 갈수록 조금은 힘이 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인지도.
020. 앤 패디먼, <리아의 나라>, 반비
아마 줌파 라히리의 책을 검색하다가 그 책을 구매한 사람들이 연관되어 함께 구매한 책 중 하나로 알게 되어 <리아의 나라>를 선택하게 된 것으로 기억한다. 정작 줌파 라히리의 책은 구매한 뒤로 읽지 않고 있지만……. 1980년대 초 라오스 내전을 피해 라오스에서 미국 서부로 이주한 몽족(Hmong) 일가 중에 뇌전증을 앓고 있는 리아를 둘러싼 이야기인데, 주요 골자는 서로 다른 문화권이 만났을 때 어떤 기준으로 어디가 옳은지를 재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그 답이다. 인상적인 것은 서양인의 입장에서 저자가 몽족의 일종의 신내림 굿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엔딩 장면인데, 타자의 시선으로 익숙한 자아의 문화를 들여다보는 것은 일종의 임사체험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어떤 각도로 읽어도 좋지만, 나는 1월에 품었던 서사라는 키워드로 이 책을 읽었다. 내가 믿는 서사와 네가 믿는 서사가 충돌할 때 어떤 갈등이 생겨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다른 서사 속에서 공통의 언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021. 세르브 언털, <여행자와 달빛>, 반비
2월에는 <로쟈와 함께 읽는 헝가리 문학>을 따라간다. 미국에서 전자책으로 구해서 읽을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읽어볼 생각이다. 세르브 언털의 <여행자와 달빛>을 가장 먼저 읽는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부터 로마로 이어지는 여정을 읽다 보니 헝가리 언어로 쓰여진 <데미안>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여러 남녀가 등장하여 교차하고 소멸되는 과정을 보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유년기의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어른, 그것은 여전히 너무나 많지 않은가” 라고 썼다가 이내 뒤의 부분을 “계속 달아나는 인생” 이라고 수정해 두었다. 여전히 내 안에 소년이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 소년이 꼭 순수한 시절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는 과거를 그리워하고 그것으로부터 나는 사실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생각으로 인해 현재의 삶이 계속 정착되지 않고 미끄러지고 달아나는 경험, 그런 경험은 사실 여전히 너무나 많지 않은가.
022. 외르케니 이슈트반, <장미 박람회>, 프시케의 숲
예전에 일본에서 만든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1997) 를 아주 재미있게 여러 번 본 기억이 난다. 현실적인 사람 혹은 현실에 없을 것 같은 캐릭터들이 모여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데 사실 여기서 이야기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연결은 되어 있지만 하나로 관통된 서사라고 부를 수는 없다. 어찌어찌하여 계속 이어지고 말이 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전체에서 조망하면 말이 되지 않는 서사인 경우가 많다. <장미 박람회>는 타인의 죽음이 누군가의 목적이자 수단이 되는 이야기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해서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이 경우 그 사람들은 반드시 죽어야 하며, 죽어야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소비되는 이야기일 뿐 미래로 전승되는 서사는 될 수 없지 않은가. 부조리를 다루는 이야기는 바로 이 점을 이야기한다고 믿는다. 목적과 수단이 우리가 알던 것으로부터 멀어져갈 때 그것은 쉽게 휘발되고 소비되는 스토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접하는 우리 역시 쉽게 휘발될 뿐이라고.
023. 도어, <서브 머그더>, 프시케의 숲
예스24에서 발행하는 [책읽아웃] 도어 편을 함께 들으며 이 책을 읽었다. 황정은 작가가 진행한 [책읽아웃]의 제목은 “이 인물이 문학 속에서 오래 기억되었으면” 이었는데, 여기서의 인물은 소설 도어 속 에메렌츠라는 여성일 수도 있고 혹은 이 소설을 집필한 작가 서브 머그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메렌츠라는 캐릭터는 너무나 생생하고 압도적이었고, 인물과 서사를 밀도있고 우아하게 기술한 작가 역시 대단히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의미로 올 해의 책 후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동시에 이 책을 타인에게 권하는 것 역시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내게 다가온 밀도 높은 감동이(이것을 감동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니면 묵직한 충격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지루한 어려움으로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고, 그들의 지루한 어려움을 목격하는 나의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나 혼자 나의 감정을 간직하고 증언하며 그것을 곱씹고 싶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