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왜 틀릴까?
큰 호랑이입니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질문과 그때 답이라 생각한 것들을 적고 있습니다. 비록 나중에 틀릴지라도요.
1. 어떤 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 해야 할까요?
- 클래식한 스타일을 합니다. 클래식한 스타일이란 전형적인 스타일을 의미합니다. 소비뇽 블랑은 소비뇽 블랑 다워야 하고, 까베르네 소비뇽은 까베르네 소비뇽 다워야 해요. 전형적인 스타일이 아닌 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 해서 맞출 확률은 0%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엔 너무나 많은 와인이 있기 때문이에요. 안타깝게도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양한 향과 맛이 더해져서 전형적인 스타일이 아니고서는 기준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맞추기가 불가능하죠. 이건 2년 전에 글로 자세히 남겼으니 참고하실 분은 아래 글을 참고해 주세요.
https://blog.naver.com/wavejdh/222039875895
2. 전문가들은 왜 틀릴까요?
- 와인 전문가에 대한 말을 오해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전문가는 직무에 대한 전문성을 나타내는 것이지 단순히 와인 모든 것에 대한 전문가는 아닙니다. 와인 지식을 기본으로 에놀로그는 양조 전문가, 소믈리에는 서비스 전문가, 강사는 강의 전문가, 마케터는 마케팅 전문가, 어드바이저(통상 판매원을 지칭합니다)은 판매 전문가입니다.
와인 지식만 잘 알아선 사실 밥벌이 불가능이에요. 직무상 전문성을 갖고 있어야 전문가가 될 수 있죠. 지식은 당연히 더 많이 갖추는 게 좋겠지만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직무상의 수요자들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느냐가 그 직무의 평균 전문성의 수준을 정하기 마련입니다. 이건 어느 산업이나 다 마찬가지일 텐데요, 커피 전문가라고 해서, 맥주 전문가라고 해서 그 산업 모든 걸 전반에서 다 잘 알기는 힘듭니다. 만약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돈을 잘 벌고 생계가 가능한 직업이 있다면 블라인드 테이스팅 전문가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전문가들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틀렸다? 그럼 충분히 지적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런 전문성을 띠는 직무는 와인에서 아직은 없습니다. 즉, 정리하자면 잘하면 플러스 요인인 것이지 못한다고 마이너스 요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잘 못 맞춘다고 이상한 건 아닙니다. 잘 맞추는 게 이상한 걸 넘어서 비상하다고 봐야죠.
실제 마스터 소믈리에나 와인 마스터도 생각보다 많이 틀립니다. 노출이 잘 안돼서 그렇지 외국 유튜브를 보면 1번에서 언급한 클래식한 스타일이 나올 경우 맞출 확률이 꽤 높지만 그 외엔 거의 다 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와인킹 채널의 피터나 패트릭은 와인 마스터에서도 연륜이 꽤 있으신 분들입니다. 그만큼 경험치가 엄청나다는 걸 반증합니다. 그분들과 비교를 하면 오히려 그분들 명예를 욕 먹이는 것일지도 몰라요.
3. 구분을 못하는 데 좋은 거 사 마시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 의미가 없어요.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지 못하다는 게 의미가 있습니다. 어차피 비슷한 재질의 같은 옷인데 왜 굳이 브랜드 옷을 사 입을까요? 잊을만하면 스타벅스 커피보다 맥도날드 커피가 더 맛있다는 실험 결과가 나오지만 스타벅스 매출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30만 원짜리 청소기나 100만 원짜리 청소기나 실제 본질적인 기능 차이는 적은데 왜 굳이 우린 100만 원짜리 청소기를 살까요? 반대로 보면 답이 너무 뻔하게 나옵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브랜드는 같은 향을, 같은 맛을 더 가치있게 만듭니다. 편견이 실제 뇌를 조작하는 거지요.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편견은 맛을 바꿉니다. 동일한 와인을 가격이 싸다고 주었을 때와 비싸다고 주었을 때 맛을 느끼는 게 다르다는 건 이미 입증이 되었죠.
4. 틀릴 수밖에 없는 이유
-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해서 틀리는 이유가 저가 와인을 테이스팅 해서, 실력이 부족해서, 기타 등등 사실 다 맞는 이유입니다.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틀리는 게 아니라 추론은 여러 가지 근거와 이유를 찾아서 복합적으로 결정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 언급하는 이유들이 다 맞는 말입니다만 본질적으로 접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가혹하게 이야기하면 실력 부족으로 다 정리될 수도 있겠지만 이 실력 부족이 전문성 부족과 일치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봐야합니다. 우리가 맛을 분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뇌에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지나치게 코와 혀의 기능을 믿고 있지만 사실은 뇌가 우리의 맛을 만들어 냅니다. '맛의 원리'란 책에선 맛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뇌가 이미 판단을 내려놓고 먹으면서 약간의 보정을 하는 정도가 다라고요. '우리가 식당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아니면 멀리서 간판을 볼 때부터 이미 어느 정도 맛은 판단한다. 그래서 자신의 무의식적 판단치보다 뛰어나면 감탄하고, 아니면 실망하는지도 모른다' 안 믿기겠지만 실제 맛이 작동하는 원리가 이렇다고 합니다.
안 믿기시는 분들은 지금 편의점 가서 자주 사 마시는 맥주와 다른 맥주를 섞어서 블라인드로 마셔보세요, 내가 자주 먹는 라면과 다른 라면을 몇 개 사서 블라인드로 비교해 보세요. 하기 전엔 다들 잘 맞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해보면 거의 다 틀립니다.
훈련된 조향사가 새로운 향수를 쉽게 분류하고, 숙련된 포도주 전문가가 와인을 잘 구분하지만 이것은 후각 능력보다 훈련된 기억에 의지합니다. 다시 말해 전문가의 강점은 후각 능력이 아니라 지적 능력에 있으며 이것은 규칙적인 연습에 달려있습니다. 또한 전문가의 식별 기술은 정보가 서로 일치할 경우에 국한됩니다. 인위적으로 정보를 조작하면 구분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화이트 와인에 붉은 색소를 섞어 레드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 전문가들조차 그 와인으로부터 고급 레드 와인 특유의 향이 난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믈리에의 뇌를 찍은 영상 자료를 보면, 와인의 맛을 볼 때 비전문가의 뇌와는 상당히 다르게 활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믈리에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 그의 뇌는 맛과 냄새의 정보가 수렴하는 영역에서의 활동이 강화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영역에서의 활동이 강화됨으로써 소믈리에는 향미의 효과를 보다 섬세하게 지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뇌의 좌반구는 분석적인 과정을 담당하므로, 위와 같이 활동이 강화된다는 것은 소믈리에가 보통 사람들에 비해 보다 지적으로 맛을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와인을 삼킬 때 소믈리에의 뇌는 기억, 언어, 결정 등과 같은 보다 고차원적인 인지 기능과 관련이 있는 영역에서 더욱 큰 활동을 보여줍니다. 이 영역에서의 활동이 증가됨으로써 소믈리에의 분석적인 감미 경험이 한층 더 강화됩니다. 이런 뇌 영상 연구 결과는 소믈리에들이 가진 진정한 기술에 대해서도 잘 설명해 줍니다.
소믈리에의 해박한 지식은 그들로 하여금 보다 쉽게 수많은 향미의 종류를 알아내고, 범주화하고 기억하게 해줍니다. 이 향미들은 포도의 품종이나 생산 과정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과 시음 훈련이 없다면, 아무리 와인을 즐기고 자주 마시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포도주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문가를 만드는 건 특별한 지적 능력과 사고 과정입니다. 단지 더 뛰어난 후각적 심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정 음식의 냄새를 떠올리고, 성분을 섞었을 때 어떤 냄새가 날 지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핵심입니다.
《 맛 이야기 》
무엇인지 모르면 지식을 활용할 기회가 닫히죠. 코와 혀의 기능이 뛰어나서 테이스팅을 잘 하는 게 아니라 충분한 이론 지식이 있기 때문에 테이스팅도 잘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핵심입니다. 까베르네 소비뇽인 걸 알고 마시면 까베르네 소비뇽이라고 더 잘 느껴질뿐만 아니라 더 많은 걸 느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보를 차단해버리면 당연히 기본 능력치가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거예요. 맛을 분석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학습된 지식의 뇌인데 사전 정보를 차단해버리니 뇌가 맛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게 본질적으로 틀릴 수 밖에 없는 이유죠.
와인 실력 = 블라인드 테이스팅 실력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해요. 물론 그렇다고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잘 하는 사람이 없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전형화된 와인 스타일 안에서 그 근거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에 꾸준히 훈련하면 확률은 더 높아집니다. 다만 이것이 전문성으로 인정받기가 힘든 이유는 위에 언급했던 것처럼 블라인드 테이스팅만 잘한다고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이유와 일치합니다. 중요도나 비중이 떨어질 수 밖에 없죠.
눈을 가리고 테이스팅을 한다면 조향사를 넘는 수준의 후각 훈련이 되어야 그나마 정확한 향을 캐치할 수 있고 실제 와인 지식으로는 최상위 직무인 에놀로그에서조차 같은 와인을 매일 시음해서 내가 전날에 판단했던 향과 맛의 수치가 동일한지 비교하는 훈련을 합니다. 맞추기가 애초부터 굉장히 어렵다는 뜻이죠. 그래서 결과보다는 추론 과정에 의미를 많이 둡니다. 공인 시험이나 대회에서도요.
5. 고를만한 선택지가 너무 많다
- 와인 비기너 입장에서 블라인드를 한다면 오히려 경험한 와인도 적고, 아는 품종도 적어서 선택지 자체가 매우 적어집니다. 이런 적은 선택지 때문에 우연한 확률로 잘 맞추는 경우도 생깁니다. 예를 들어 뉴트럴한 화이트 와인이 블라인드로 나왔을 때 비기너가 유추할 수 있는 건 샤르도네 하나이지만 와인 전문가 입장에서는 샤르도네, 뮈스카데, 가르가네가, 알리고떼 등을 고려하게 됩니다. 여기서 부터 조금이라도 방향을 트는 순간 아예 다른 품종을 고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이 틀리는 경우도 생깁니다.
6. 그럼 와인 평가가 의미가 있나요?
- 글 끝으로 다가올수록 아마 이런 의문이 드실 거예요. '아니 그럼 와인 평가라는 게 의미가 있나??' 제가 이미 다 정리해뒀죠. ㅎㅎ 궁금하신 분은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https://brunch.co.kr/@youthinking/14
7. 끝으로
- 블라인드 테이스팅 참 어려워요. 덧셈, 뺄셈처럼 딱딱 안 나온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와인 전문가들인데 왜 다 틀려? 이런 의문이 당연히 들고 물어볼 수 있죠. 거기다 대고 넌 아무것도 몰라 이런 식으로 답을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해가 쌓이기 전에 '이해'라는 단계가 하나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그 역할을 위해 이 글을 남겨봅니다. 오해를 풀만한 본질적인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잘 없더라고요. 와인 회의주의자?인 저는 이미 이런 생각을 옛날부터 했던 터라 후다닥 글을 남겨봤습니다. 소비자분들도 너무 실망하실 필요 없어요. 각자의 영역에서 또 전문가분들을 마주한다면 정말 프로페셔널 하고 멋있어요. 물론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 분들이 멋있습니다. ㅎㅎ
그러니 모두에게 사랑과 평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