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호랑이입니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질문과 그때 답이라 생각한 것들을 적고 있습니다. 비록 나중에 틀릴지라도요.
1. 모호한 점수 경계
3개가 보이면 3이라 말하고, 4개가 보이면 4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와인을 평가하는 일이 숫자를 세는 일처럼 경계가 확실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헷갈릴 일이 전혀 없겠죠. 아쉽게도 와인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총평을 내리는 일이기 때문에 3점과 4점 사이를 구분 짓는 명확한 경계가 없습니다. 가령 10점 만점인 복합성을 어떻게 느끼면 10점이 되고, 7점이 될까요? 이 기준을 숫자처럼 명확하게 나타내는 와인 평가 매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결국 복합성이 얼마나 풍부한지에 따라서 10점을 주고, 9점을 주고, 8점을 주는 식인데, 8점과 9점을 여러분은 구분할 수 있으시겠나요? 정작 더 중요한 문제는 품질 평가 요소들이 거의 대부분 이런 식이라는 거죠. 그래서 와인 평가 점수는 점수 폭이 큰 것보다 작은 게 좋습니다. '1점-나쁜, 2점-중간, 3점-좋은'이라는 평가 기준이 '1점-꽤 나쁜, 2점-나쁜, 3점-살짝 나쁜, 4점-중간, 5점-중간보다 좀 좋은, 6점-살짝 좋은, 7점-꽤 좋은, 8점-많이 좋은, 9점-확실히 좋은, 10점-완전 좋은' 기준보다 와인의 좋고 나쁨을 분명하게 나타낼 수 있거든요.
와인 점수 평가 척도는 크게 100점 척도와 20점 척도가 있습니다. 100점 척도는 이러한 모호성을 없애기 위해 기본 점수를 50점-60점 주고 평가를 해버리기도 합니다만 그럼에도 모호성에 대한 비판은 늘 따릅니다. 여전히 점수 폭이 크기 때문이에요. 20점 평가 역시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점수 폭이 작으면 모호성은 줄어들 수 있어도 평가가 지나치게 단순화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따르죠.
2. 점수를 부여하는 평가자의 개별성
모호한 점수 경계를 극복하기 위해 복합적인 향 기준을 특정 향이 6개가 느껴져야 한다고 합의를 했다고 해볼게요. 평가 기준 자체의 모호성은 없어지겠죠? 하지만 평가는 다시 금방 일관성을 잃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걸 평가하는 사람마다 향을 느끼는 범위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와인을 마시고 6개의 향을 잡아낸다면, 어떤 사람은 3개, 어떤 사람은 10개 넘게까지도 느낄 수 있어요. 타닌을 느끼는 일, 산도를 느끼는 일, 균형을 느끼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동일한 점수 척도를 사용해도 점수를 부여하는 체계가 사람마다 달라 명확한 평가가 어려워진다는 거죠. 평가 요소에 모호성을 없애도 맛을 느끼는 일을 수치화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좋은 품질의 와인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은 풍부한 스타일에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섬세하고 은은한 스타일에 더 높은 점수를 줄 수도 있을 거예요. 이런 영향 때문에 한 와인에 대해 누군가가 88점을 주고, 누군가가 90점을 주었다고 다른 품질의 와인이라 쉽게 말할 수 없고, 똑같이 90점을 주었다 해서 그게 완전히 같은 잣대로 90점을 주었다고 섣불리 이야기할 수 없겠죠.
3. 전형성의 인정 범위
소비뇽 블랑을 마시고 너무 상큼해서 낮은 점수를 줄 수 있을까요? 비오니에를 마시고 꽃향기가 거슬려서 낮은 점수를 줘도 될까요? 평가 점수에서 전형성은 고려되기도 하고 고려되지 않기도 하지만 대부분 평가가 블라인드로 이뤄진다고 가정하면 사실상 전형성은
고려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특정 와인의 개성이 인정될 확률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렇다면 블라인드가 평가가 아니라고 해보죠. 소비뇽 블랑의 산도와 비오니에의 꽃향기의 품질은 과연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을까요? 쉽게 정의내릴 수 없어요. 전형성에 대한 기준 역시 점수로 환산하기가 상당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4. 과포화 된 높은 점수
94점을 받은 와인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우와! 이 와인 너무 마시고 싶다' 이런 생각 드세요? 큰 감흥이 없지 않으신가요? 더 이상 94점, 95점, 96점의 와인들은 우리에게 환상을 주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런 점수를 받은 와인이 너무 많거든요. 사실 몇십 년 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이런 점수를 받은 와인은 극히 적었답니다. 당시 소비자들에게 아주 감탄할만한 점수인 거죠. 그러나 오늘날 많은 양조 기술 발전으로 좋은 점수를 받는 와인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 아마 체감적으로는 다들 느끼고 계실거라 봅니다.
왜 낮은 점수를 받은 와인을 볼 수 없을까요? 와인 평가 기준을 살펴보면 웬만큼 기본을 갖추고 만들어진 와인은 모두 85점 이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정말 낮은 점수를 받은 와인이 있더라도 그 점수를 공공연히 공개하려 할까요? 아니겠죠. 끝으로 좋은 점수를 받은 와인이 점점 많기 때문에 더 찾아볼 수 없게 된 겁니다. 이렇게 좋은 점수를 받은 와인이 과포화가 되면 점수의 의미는 더욱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높은 점수 자체가 기본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죠. 처음으로 썼던 스마트폰을 지금 당신의 손에 다시 쥐여준다면 그때처럼 감탄할 수 있을까요?
5. 중간 점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평균과 중간 또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에 대해 더 신뢰하고 믿음을 가집니다. 와인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와인 평가를 할 때 양극단의 기준을 지나치게 낮게 혹은 높게 잡아 최저점과 최고점을 주기 꺼려 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러한 경향을 의식하지 않으면 중간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뜩이나 점수의 경계가 모호하고 평가하는 사람마다 점수를 부여하는 체계가 다른 상황에서 이런 중간 편향은 더욱 심해지면 심해졌지 절대 덜 하지는 않겠죠?
6. 와인 맛의 변화
2010 빈티지 보르도 와인을 2010년에 마신 것과 2015년에 마신 것 또 2020년에 마신 것을 동일한 와인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요? 2015 빈티지 나파 와인을 2015년에 마신 것과 2021년에 마신 것을 동일한 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애석하게도 와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해서 변합니다. 병안에서도 향과 맛이 계속 바뀌죠. 그에 반해 미디어의 평가 점수는 영원히 박제됩니다. 똑같은 와인을 시기를 다르게 해서 마신다고 했을 때 그 와인을 똑같이 평가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숙성 잠재력 평가 요소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점수가 얼마나 일치하는지 실험 결과를 살펴봐도 꽤나 차이가 많이 있는 걸로 나타나는데요, 사실 이렇게 시간 범위가 크지 않더라도 좀 더 작은 범위로도 이 모순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와인을 마실 때 시간이 조금 지나도 향이나 맛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죠? 여기서 브리딩과 디캔팅 등에 대한 효과를 논외로 치더라도 이런 태도를 갖고 우리가 와인을 마신다면 와인 점수를 믿는 것은 사실 엄청난 모순입니다. 와인을 평가할 때 시간 단위로 와인을 체크해서 점수로 환산하지는 않으니까요. 3시간 있다가 와인이 좋아졌다고 말하면서 이 와인 점수는 99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비약인 셈이죠. 그 99점은 어느 순간에 평가되었는지 확신할 수 있을가요? 또 84점 받은 와인을 어느 순간에 평가했는지 단언할 수 있을까요?
7. 와인 메이커의 의도
수능 언어 시험에 나온 시 문학 문제를 직접 출제한 시인도 풀지 못했다는 이야기 들어보셨나요? 내추럴 와인을 마시면서 이 이야기가 문득 떠오르더라고요. 내추럴 와인이 유행하면서 와인 평가가 더욱 무의미해졌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볼게요. 와인 메이커의 의도가 품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보통 와인을 마실 때 산화, 브렛 등의 캐릭터는 결점으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내추럴 와인에서는 이런 캐릭터들이 마냥 결점이라고 보진 않죠.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가령 한 와인 메이커가 와인을 양조할 때 의도적으로 브렛 캐릭터를 만들어서 와인을 생산했다면 그건 좋은 점수를 줘야 할까요? 나쁜 점수를 줘야 할까요? 내추럴 와인 생산자만 그런다면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브렛 캐릭터를 살리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내세우는 생산자들도 많이 있죠. 다른 결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느껴지는 양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간주하는 결점을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나아가 평가를 하는 입장에서 이 와인의 결점 캐릭터는 와인 메이커의 의도인지 의도가 아닌지 구분할 수 있을까요? 와인을 만든 사람의 의도대로 잘 나왔다면 사실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나쁜 와인을 만들고자 하는 와인 메이커는 없을 테니까요. 이런 모순들이 생기기 때문에 수치화해서 점수를 평가하는 일은 사실상 어렵기만 합니다.
와인 점수가 갖는 함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1번과 2번에 대한 이유가 다른 요소들을 다 포함 시키기도 합니다. 그만큼 경계가 확실하지 않은 기준과 개별마다 느끼는 맛을 수치화할 수 없다는 건 평가를 하는 데 있어 아주 큰 벽으로 작용합니다. 언젠가 와인 품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평가와 점수의 진짜 가치는 그 와인의 진짜 맛을 평가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 산업의 문화 발전을 위해 또 대중에게 접근성을 높이고 확산을 위해 꼭 필요한 콘테스트에 있다고 봅니다.' 지금도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점수가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재화든 더 좋고, 더 좋지 않은게 있어야만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고 또 산업이 발전되기 마련이니까요. 로버트 파커가 점수를 100점으로 주면서 와인 산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처럼요.
'점수는 시스템 안에서 단지 와인을 유용하게 배치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지, 객관적인 품질의 지표도 와인의 본질도 아니다.' -Jamie Go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