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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지우개 Jul 18. 2023

나이가 들면

백수린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나이가 들면 나 같지 않은 마음과 나 같은 마음을 구별할 수 있어 이 마음은 내치고 저 마음은 꼭 쥐고는 당당히 걸어갈 줄 알았다. 스스로와 싸우지 않고, 내 손을 내가 단단히 잡고서는 나를 불안에 내버려 두는 일은 없을 거라고.     


들만큼 든 나는 아직도 자연의 이치를 알면서도 자주 슬프고, 피기도 전에 져버린 꽃을 상상한다.     


대체 무엇이 나인지, 아니 내가 아닌지 잠이 오지 않다가 아직 나이가 덜 들어서 그런 것일까 오만해지다가 아무래도 나는 나이의 무게에 나를 가뿐히 얹을 만큼 충분히 견디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어느 날은 내 모습이 나이보다 더 허름해 보여 잘못 늙었다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주 조금은 나를 ‘타인’으로 여기는 힘이 생겨 적어도 밑바닥까지 가라앉기 전에 나를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좀 더 나이가 들면 결국은 나를 보는 내가 닳고 닳아 더 멀리서 타인인 나를 볼 수 있고 더 가볍게 나를 들어 올릴지도.     


죽었다고 생각했던 식물에서 새순이 올라오고 있을 때 나는 그저 신기하고 행복하다. 어차피 행복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감각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죽었다가 살아나는 행복이 잠시라도 왔으면 됐다. 어린 날 소망한, 나를 충분히 사랑하여 매 순간 유연한 나는 아니지만 좀 더 나이가 들면 빈번해서 강해지는 슬픔도, 허사의 가능성을 나열하는 정도도 줄어들 것이다. 잘 보이지 않던 나무의 흔들림에는 나도 따라 흔들리고, 빛을 받아 정신없이 반짝거리는 바다의 출렁임에는 절대 출렁이지 않게 되리라.       

      

나이가 들면 남으로 난 창에서 강이 보이는 작은 오두막에 살 테니 시간이 되면 놀러 와서 내가 키운 옥수수를 같이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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