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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믿음 Mar 02. 2024

재능이 없는 걸까?

믿었던 학교의 배신

*21년에 적은 글입니다. 3년만에 돌아온 '요리 회고록'

 어느 집단에든 그런 사람이 있다. 한 번 알려주면 곧바로 잘하는 사람,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해내는 사람, 새로운 환경에 금세 녹아드는 사람. 반면 그런 사람도 있다. 몇 번을 해봐야 겨우 보통을 해내는 사람, 알려 주지 않으면 모르는 센스 없는 사람, 그래서 많이 혼나는 사람.


느리고 더딘 사람, 바로 나 같은 사람. 어쩌면 평범한 다수이자 '우리'



 오늘도 손바닥이 시큰 거린다. 어제에 이어 롱 스푼을 3대나 맞았다. 어제는 제한 시간 초과! 오늘은 완성도 부족! 빠르게 하려고 하면 완성도가 떨어지고, 완성도를 높이려 하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누구는 처음임에도 부족함 없이 척척 잘 해내기만 하는 데 왜 나는 항상 이 모양인 걸까? 태생부터 몸치인지라.. 역시 요리도 마찬가지인 걸까? 


요리라는 분야에서도 나는 여전히 열등생이었다. 


어차피 혼날 거라면 완성도를 높여 시간이 초과되는 것보다 속도를 올리는 편이 서바이벌 같고 훨씬 더 재밌었다.  요리를 극도로 망치지 않는 이상 한 대 덜 맞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정교함보다는 속도 그리고 서바이벌을 즐겼다. 서바이벌 속에 녹아드는 것이 당장은 그 상황을 모면하는 것처럼 보여 좋아 보이지만, 이렇게 하면 뭐든 어중간해진다. 안 좋은 학습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장의 보상이 필요했다. 남보다 내가 낫다는 걸 인정받아야 했다. 그래야 도태되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큰 꿈을 가지고 이 학교에 왔는데!


내 요리실력은 중하위권이었다. 혼날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칭찬을 받기도 했다. 다행히 최하위권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열정만큼은 남부럽지 않았다. 1학년 때는 선생님에게 인정받는 에이스 그룹에 들어 보고자 하루에 무 두 통씩을 썰고, 기숙사로 돌아가 요리 원서를 읽었다. 물론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대부분 그래 봤을 것이다. 밴드와 골무를 항상 갖고 다녔던 그때의 그 열정!

스물여덟, 글을 쓰는 내 왼손 검지 위에 아직도 그때 그 흉터가 선명하다. 이 영광의 상처가 결국 선생님께 인정받는 보답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억울하게도 원래 잘하는 놈들은 계속 잘한다. "짜증 나게 진짜..!" 내가 겨우 보통을 해내면 그 얘들은 그 이상에 올라가 있다. 학기가 거듭될수록 슬슬 격차가 느껴졌다. 답답했지만 열정은 식어갔고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불안하고 결핍 가득한 마음은 뒤에 숨겨둔 채로.


나도 선생님께 예쁨 받고 싶은데.. 왜 선생님이 무섭기만 할까. 나만 싫어하는 것 같고..



  

 어느 반이던 블랙홀 조가 존재했다. 음식을 만드는 속도도 느리고 완성도조차 극히 낮은 사람들. '하위 10%' 반에서 4~5명은 꼭 존재했다. 속되게 말하자면 얼빵 그 자체인 사람들이었다. 하위권인 나조차도 답답한 친구들이었으니까. 


사람은 간사하고 합리화를 잘하는 동물이다. 내 기준치의 노력으로 단시간 안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합리화할 다른 대상을 찾는다. 상위권으로 오르려는 노력을 잠시 접고, 나보다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위안 삼는다.


나를 약자라 칭했지만 나 역시 최약자를 포식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기적이었다.


사람이란 단시간에 강자를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일찌감치 단념하고 최약자를 포식한다. 그리고 보통의 삶에 안주하며 살아가게 된다. 물론 언젠가는 다시 도약하리라는 열망을 가지고.. 나머지는 분명 시간이 해결해주리라는 위안을 가지고.


약육강식의 세계란 게 그렇다. 중간층이 노력을 멈추고 방관하면 결국 그 사슬은 무너지지 않고 지속된다. 강자는 더 강해지고, 약자는 계속 도태된다. 알지만 방관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요리의 세계였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있었던 제과제빵 실습을 좋아했다. 1인당 1판 이상의 빵 또는 케이크를 굽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한아름 만든 빵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고향 친구들과 부모님께 나눠줄 생각에 설렜었다. 요리 학교에 오고 이제 제법 그럴듯한 요리를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게 뿌듯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이것에도 제약이 따른다. 선배들한테 나눠줄 빵을 어느 정도 빼둬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누는 건 좋지만.. 내가 자의적으로 주는 것이 좋다. 관습적으로 우리는 선배들을 챙겨야 했다. 특히 동아리 직속 선배들을 시작으로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에게 빵을 줘야 했다. 이런 관습대로 하지 않으면 안 좋은 소문이 퍼졌다. 싹수없는 후배가 되는 것이다. 모두가 Yes라 할 때 No라고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가끔 인맥 넓은 동기 친구들은 3학년 선배들에게 '고급 양식'시간에 만든 멋들어진 레스토랑 요리를 받았다. 부러웠다. 그 친구들은 모두에 선망의 대상이 됐다. "왜 나는 못 받았을까?" 관습대로 한다고 해서 모두가 사랑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타고나는 것도 있어야 했다. 성격이라든가, 실력이라든가, 빼어난 외모라 던가.. 


사회성이 없고 내성적인 성격이다 보니 나는 선배나 선생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요리 대회 정보는 도대체 어디서 얻는 걸까? 3년 내내 딱히 몰랐다. 가끔 학교 게시판에 붙은 국제대회 포스터나 마스터 셰프 1회? 니 뭐니 본 적은 있지만.. 멋모르는 내가 혼자 준비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아는 것이 없었다. 그냥 당연히 때가 되면 선생님이나 선배님들이 먼저 제안을 해주고 스파르타 훈련을 시켜 내보내 줄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3년 내내 생기지 않았다.


요리라는 세계 역시 특정 집단 안에 들지 못하면 살아 남기 힘들었다. 근데 그 집단은 내가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끼리끼리 모여 쥐도 새도 모르게 만들어진다. 나중에는 들어가고 싶어도 뾰족한 수가 없다. 내가 뛰어나게 잘나지 않았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철면피 깔고 찾아가 보고 부딪혀야 한다. 


 나는 그나마 담임 선생님이랑 친했다. 담임 선생님은 수학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조리 전문학교이다 보니 실무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인 것이 더 좋았다. 말 그대로 실세니까! 유명 호텔과 커넥팅을 직접적으로 해주실 수 있는 인맥이 되기 때문이다. 호텔에 견학을 가거나, 방학 때 실습 자리를 주선해주시거나 하는 확실히 일반 학생들보다는 우선적으로 추천해주는 구조가 있었다. 교과 선생님들 중에서도 인기 있는 선생님이 있었다. 신세 대면서 친화력이 좋고 대학교 잘 보내는 선생님? 일찍이 요리에 꿈을 접고 실업계 전형으로 좋은 대학을 노리는 학생들도 꽤나 있었다. 기숙 사파와 통학파, 기능반과 수능반, 일어반과 불어반 그리고 힘 있는 동아리와 임 없는 동아리 등으로 수많은 집단 구조가 존재했다.


일반 교과 담임 선생님인데 실기 선생님과 친해지려면 실습 시간에 잘해서 인정을 받거나, 선생님께 싹싹하게 붙임성 있는 성격이거나 아니면 여자이거나.. 나는 해당되는 게 없었다. 대부분 실기 선생님들은 남자다. 물론 선생님들이 대놓고 차별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자연 저으로 편향적인 면이 있다. 주방의 구조가 지금은 다를 지라도 그때는 그랬다.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분명 남자로서 차별도 확실히 존재했다.



재능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요리 외에도 딱히 무언가를 잘 해내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군계일학의 도드라진 이 세계에서 변두리를 챙겨줄 수 있는 리더의 부재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더 부추겼다. 포식자만 끊임없이 강해지고 약자는 설 자리를 잃어갔다. 약자들이 그럼에도 버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나름 요리계의 상위 집단에 들어왔고,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라는 희망고문 덕이다.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실력이 좋던가, 집안이 그럴듯하던가, 성격이 싹싹하던가, 천운을 지녔던 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독고다이' 해낼 깡이라도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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