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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댁 Sep 09. 2024

미국으로 시집가는 외동딸

"결혼하면 바로 미국으로 가신다면서요."

"아하하, 네에."

"어머. 엄마가 너무 서운해하겠다.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웨딩 촬영을 앞두고 마사지를 받는 도중 가게 사장님이 내가 미국으로 시집을 간다는 말을 엄마에게 전해 들었는지 내게 말을 걸었다. 마사지용 침대에 나있는 구멍에 얼굴이 들어가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음에도 나의 뒤통수에다 대고 사장님은 계속해서 본인의 이야기를 하셨다.


"저도 딸 시집보냈는데요. 딸이 시집가서 대구에서 산다고 했을 때도 너무 싫더라고요. 너무 멀어서."

"진짜요? 대구면 굉장히 가까운데."

"그러니까. 근데도 싫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다 해줄 테니까 우리 집 근처에서 살라고 했어요.

자기들은 얼씨구나 하면서 좋다고 했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너무 가깝게 사나 싶기도 해요."

"그래도 가까이 있는 게 좋죠."

"결혼식날은 내가 어찌나 울었는지. 사돈어른이 자기가 더 잘할 테니까 울지 말으시라고 했었다니깐요."


여전히 마사지용 침대에서 옴짝달싹 못한 채로 연신 호응을 하던 나는 눈을 감고 나의 결혼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과연 내 결혼식에서 엄마는 울까?



엄마와 나의 역사는 가히 대단하다. 지금의 친구 같은 우리가 있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을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우리 사이의 가장 단단한 초석 역할을 한 건 단연코 나의 사춘기 시절이다. 정말 말 잘 듣던 딸내미에서 하루아침에 말썽꾸러기 딸이 됐다. 다들, 누구나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살겠지만, 나는 정말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내왔다. 그리고 그런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며 나의 자아가 요동치기 시작하자 내 안에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엄마와 나만 아는 굴곡진 이야기의 서막이었다.


이제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왜 우리가 그렇게 피 터지게 싸웠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엄마 품 안의 자식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었다. 엄마가 원하는 딸의 형상에서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그 틈에서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던 아빠는 그 시절 덕에 지금도 우리가 다투면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현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무튼 그때,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속담을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내 생명의 기원에서 이원화될 준비를 시작했다.


모태에서 벗어난 나의 세계. 나도 처음 가보는 그 미지의 세계는 앞이 보이지 않고 그저 깜깜했다. 때로는 광활한 우주에 나 홀로 남겨져 공명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새벽녘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세계를 찾고 싶었다. 나의 길의 앞은 보이지 않지만, 꼭, 이곳을, 내가 걸어 나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면 발버둥이라도 쳤다. 그리고 그렇게 고군분투하며 내 안에 내가 남긴 나의 발자취는 그저 헛발질이 아니었다. 여러 번 꾹꾹 눌리고 눌린 발자국은 내 세계의 단단한 지반이 되었고 나는 그렇게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넓혀가던 내 세계에 거대한 지각 변동이 생겼다. 바로 결혼.


또 다른 세계를 가진 사람과 내가 만났다. 나의 세계와 그의 세계는 묘하게 닮은 듯 하나 속을 들여다보면 극명히 다르다. 그렇게 사춘기 시절 발버둥 치며 나만의 세상을 갖길 원했지만 이제 또 다른 세상을 받아들여야 상황에 맞닥뜨리며 깨달았다. 그렇게 엄마와 다르게 살 거라고 외치며 살았지만, 결국 내 세계는 엄마로부터 기원한다는 사실을.


미국에서 결혼 전 잠시 예비 신랑과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그때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엄마의 잔소리를 내가 예비 신랑에게 똑같이 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사소한 잔소리지만 애정 어린 잔소리들. 빈속에 커피 마시면 안 된다, 물건 정리를 잘해야 집이 넓어 보인다, 짜게 먹으면 안 좋다... 그렇게 아무리 발버둥 쳤어도 DNA에 아주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는 것 마냥 엄마와 똑같은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엄마가 어릴 적 해줬던 음식, 엄마가 청소하던 방법, 엄마가 아플 때 치료해 줬던 법. 엄마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그저 자연스레 나왔다. 결혼하면 엄마가 제일 보고 싶다더니, 이래서 그런가 싶었다.



나의 중고등 시절 엄마는 집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아이들에게 수능 영어 가르치랴, 집안일하랴 바빴던 엄마였지만 아빠와 나의 끼니만큼은 절대 허투루 때우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바쁘다 보니 엄마의 메뉴는 한정되어 있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나는 음식은 소고기 안심구이다. 일단 소고기는 굽기 간편하기도 하고 맛도 좋다 보니 엄마가 자주 구워 밥반찬으로 내놓았었다. 그런데 같은 음식도 계속 먹다 보면 물리기 마련인지라, 계속되는 소안심의 향연에 나는 소고기라면 질려버리는 사태가 벌어졌고 결국 성인이 되어서도 소고기를 잘 먹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엄마는 여전히 소고기를 자주 구워준다. 내가 잘 먹었으면 하는 바람에 유명한 시장의 도축점까지 가서 굳이 굳이 소갈빗살을 사 온다. 그렇게 오늘 점심도 소고기를 구워줬는데 첫맛을 보자마자 괜스레 짜증이 났다. 내가 어렸을 때 먹던 그 소고기 맛. 묘하게 텁텁하면서 비린 그 소고기 맛이 났다. 그리고 자연스레 우리가 다퉜던 그 시절이  생각났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 엄마는 엄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오후 네시부터 몰려드는 학생들과 사투하다 열두 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쉴 수 있었지만 아빠와 나에게 힘든 내색은 잘하지 않았다. 이모님에게 맡기지도 않고 굳이 굳이 본인이 집안일도 다 했고 밥도 세끼 다 해줬으니 그야말로 슈퍼우먼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하나밖에 없는 딸은 지랄발광을 했으니, 참 고생이 많았을 엄마.


지금은 내색하지 않지만 진짜 내가 미국을 가서 엄마가 서운하면 어떡하지. 매번 물을 때마다 엄마는 자주 왔다 갔다 하면 되고, 걱정 마라, 그리고 나는 네가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더러 했는데 그 말이 진심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오늘에서야 한다. 집안일은 시켜야만 하는 아빠만 있는 집에서 엄마 혼자 도와주는 사람 없이 계속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때론 혼자 밥을 챙겨 먹는 상상은 하기만 해도 눈물이 솟구쳐 오른다.


이런저런 생각에 화장실에서 몰래 눈물을 훔쳐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김치볶음밥을 만드는 엄마 곁에 가서 섰다. 엄마 손에 든 주걱을 받아 들곤 김치와 닭가슴살만 들어간 볶음밥을 프라이팬에 꾹꾹 눌러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 가면 이런 거 아빠가 안 도와줘서 어떡해?


- 응, 안 먹으면 된다.

- 응?

- 안 해주면 되지.

- 설거지랑 분리수거랑 이런 거는

- 니 없으면 쓰레기도 안 생긴다.


그래, 나만 독립하면 되는 문제였군.

진짜 엄마는 내가 결혼해도 울지 않겠지. 아니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결혼해도 변함없이 나는 엄마고, 엄마는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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