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처럼 분주한
긴 연애가 끝났다. 간단히 곰인형을 집 밖으로 버리는 수준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방 어디를 돌아봐도 지난 시간이 묻지 않은 것은 없었다. 몇몇 상징적인 물건이 아니라 일상으로 채워져 있으면 엄두가 안 난다. 네가 산, 너와 산, 내가 산 것이 모두 뒤섞여 포기하게 된다.
걱정보다 나는 잘 지냈다. 그럴수록 허무했다. 곳곳에 그가 깃들여 있으나 동시에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저 궁극의 나로 회귀했다. 결국 누구를 만나도, 그 어떤 존재와 관계를 맺어도, 어차피 그 끝엔 본인만 남는 거 아닌가. 극강의 허무와 고요가 공존했다. 위태로운 평화가 깨지던 순간이 찾아왔다.
크리스마스도 괜찮고, 화이트데이, 밸런타인데이 다 감흥이 없었다. 심지어 내 생일도. 그런데 네 생일은 달랐다. 마치 시험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고 엄청난 시험을 치러야 하는 전날 같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마음은 습관처럼 분주했다.
내게 가장 중요했던 날. 내 무수한 비밀번호의 조합이었던 날. 새 달력을 받으면 늘 가장 먼저 동그라미를 쳤던 그날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좋아하지도 않는 백화점과 쇼핑몰을 몇 바퀴씩 돌았다.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를 일이었다.
그리곤 마침내 그날이 왔다. 커피를 쏟아 키보드를 적시고, 사원증을 길 한복판에 흘리고 다녔다. 신용카드를 카페테리아에 두고 나오고, 누군가 나를 불러도 인지하지 못했다. 겨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드디어 자정이 지났다. 하루가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용하게 살아남은 내가 가상해 소원을 들어준다면... 네 이름을 크게 불러 보고 싶었다. 때로 내 이름보다 많이 적었고 어쩌면 내가 가장 많이 불러 주었을 그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