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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 May 08. 2020

나는 붓을 들고 당신을 읽습니다.

삶의 순간 순간을 그림으로 완성시키다. 


[안녕카메라]

2004년, 학교 신문사에 들어간 뒤 처음으로 DSLR을 손에 쥐었다. 

DSLR, 지금이야 워낙 좋은 카메라가 많고 휴대폰 카메라 성능이 좋아서 디지털카메라에 대한 관심이 줄었지만, 그 시절 DSLR은 인싸가 되기 위한 필수 아이템이였다. 

묵직한 것이 사진 찍을 때마다 셔터소리가 묘한 쾌감을 던져줬다. 

그때 카메라는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멋진 선물로 기억됐다. 

(마치 적당히 술을 마셨을 때 기분을 전해주는 것처럼)  


나는 사각 프레임 속에 사소한 일상을 풍요롭게, 스쳐가는 누군가의 찰나를 뜻깊게 만들어 저장했다. 그리고 무엇이든 사각프레임 속의 들어가면 어설픈 일상도 낭만적이고, 서먹서먹했던 친구와 관계도 적당히 무르익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애정이 식었을까?

어느 순간 DSLR에 대한 취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DSLR이 보편화되면서 사진의 소중함 마저 상실됨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내  삶의 진부함을 새롭게 각색해내던 사각프레임 속 내 이야기가 사라지면서 서서히 카메라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대신 난 그림에 눈길이 갔다. 


[전시에 홀딱 빠지다]

나는 지난 10년간 회화(미술)전시회를 200회 넘게 방문했다. (거의 한 달에 2번 이상 전시회를 방문한 꼴이다.) 전시장에 가면 2시간 이상 체류하는 것은 기본이며, 특정 작품이 뇌리에 꽂히면 계속 응시하게 됐다. 마치 ‘100분토론’의 사회자가 된 듯 내 머릿속에는 서로 다른 2개의 자아가 한 작품을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사이 현실 속 나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보며, 혼자 키득키득 거렸다. 그림을 보는 ‘순간’ ‘순간’이 즐거웠고, 작가의 생각과 내 생각을 비교하며 그 자체가 행복이라 느꼈기에 전시장은 나의 유일무이한 ‘힐링공간’ 이였다. 


그러다보니 해외여행이나 출장을 가게 되면 의례적으로 미술관을 들르게 됐다. 그곳에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만날 때면 ‘보물’을 찾은 마냥 아이처럼 기뻤다. 특히 피카소,  앤디워홀 등 알만한 작가들의 어릴적 습작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울러 작가의 생가나 그가 즐겨 갔던 맛집을 방문할 때면 ‘설록홈즈’가 된 듯 그의 흔적을 찾는다고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의 황홀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 그림 얼마요?]

줄곧 전시회를 가면서 욕심이 하나 생겼다. 그림을 사고 싶었다. 아니 소장하고 싶었다. 전시장에서 나올 때 면 “아 그 작품, 내방에 걸어 두면 예뻤을 텐데...또는 우리 부모님도 직접 보시면 좋아 하실 텐 데”혼잣말을 내 뱉으며, 다음에 돈 좀 벌면 매년 두 세 작품은 사겠다고 마음 먹었다. 

결국 처음으로 2017년 8월 ‘아시아프’에서 회화 2점을 샀다. 구매의향서에 사인을 하고 내가 산 작품 옆에 동그란 빨간 스티커가 붙여지는데, 마치 청담동 여사님이 된 듯 마냥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림 한 점이 90만원 내외로 직장인에게는 적지 않은 비용이였지만, 아직도 그 순간이 잊혀 지지 않는다.


작품을 받고자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했는데, 내가 산 작품의 탄생지를 본다는 게 묘한 재미가 있었다. 고독과 사투를 벌이며 나와 다른 삶을 사는 그들 모습에 신기하기도 했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내가 산 작품이 또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데 흥미로웠다. 그렇게 매해 작품을 사면서 작가와 SNS 친구를 맺고, 응원도 하며, 작품을 통해 그들과 삶과 철학을 교감할 수 있다는데 고마웠다.  


[나는 화가다]

이제는 내 작품을 갖고 싶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주변의 현상을 내 감각의 의지해 붓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내면의 나와 마주하고 싶었고, 주변사람들에게 그런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다만, 아직 나는 붓 터치가 서툴다. 그래서 주로 즐겨 보았던 명화를 따라 그리는 것에서부터 그림 그리기가 시작됐다. 

사실 대작을 따라 그리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선긋기를 비롯해 색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얀 캔버스 위로 한겹 한겹 색이 채워지는 과정이 여간 재미있었다. 특히, 멀리서만 봤던 명화를 구석구석 확대해서 살펴보니, 작가의 고뇌와 그의 감각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가령, 고흐의' 해바라기'나 호크니의 '풍덩'을 그릴 때면 '색'이 우리에게 주는 소중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에드워드 호퍼나 줄리안 오피 등의 작품을 묘사할 때 현대인의 우울, 그리고 외로움에 대한 감각을 그들의 화풍을 통해 공감하기도 했다.  


[내 작품은 아직 ing]

10여개 명화를 따라 그리면서, 이젠 '나'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사실 10여 작품을 모작하면서 부분적으로 색과 형태를 변형하며 내 관점에서 풀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꿈꾸던 것들, 나의 감정 선을 흔들리게 만들었던 현상들, 군중에 휩쓸러 내것을 잃어버렸던 순간들을 엮어서 이미지로 투영하고 싶다. 그것을 통해 내 심신의 위로가 되는 ‘순간 순간’으로 저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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