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속에 사는 우리, ‘현타’ 하는 마그리트
영화 <타짜> 명장면인 아귀와 고니의 한판 승부는 많은 이들에게 회자가 된다. 화투판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대화, 그리고 오고 가는 돈다발은 우리 사회 속 어두운 그림자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장면 속 아귀의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여기서부터 둘의 결투는 시작된다. ‘밑장 빼기’는 화투판(게임) 룰을 어기는 것으로, 상대를 속이고 기만하는, 게임 앞에 (누구나)‘평등성’을 어기는 것이다. 즉 팽팽했던 승부의 추가 ‘밑장 빼기’로 한쪽으로 쏠렸고 아귀는 룰을 어긴 상대편에게 직접 응징하고자 했다. 그런데 과연 ‘밑장 빼기’는 룰을 어긴 것인가?
위에서 빼던 밑에서 빼던 서로 패를 모르는 상황인 데 어째 아귀는 승부를 엎었는가?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아귀는 게임의 목적이 돈이었지만, 고니는 아니었다. 결국 아귀는 자기 꾀에 당했고, 고니의 덧에 걸려든 꼴이 됐다. 어쩌면 고니의 포커페이스가 아귀의 선글라스 위에서 상대를 지배한 셈이다.
영화 <타짜> 속 아귀와 고니는 서로 패를 들키지 않고자 표정에서부터 손동작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감정) 것을 숨겨야 했다. 내 것을 숨기고 상대의 것을 볼 수 있어야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 한 장면이지만, 우리 사회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미디어와 SNS가 일상이 된 요즘, 우리는 ‘진짜 얼굴’로 상대와 마주하지 않는다.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전하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은 ‘보정(뽀샵)’을 해야 한다. 이런 ‘속임’이 일상이 되다 보니, 무엇이 진짜이고 거짓인지 판명이 어렵다. 특히 미디어가 진화될수록 그 경계는 모호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게 진정 인간의 진짜 욕구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이에 정신분석학자 ‘융’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안과 밖이 다르다. 겉으로 포장한 나와 속으로 숨은 나는 같지 않다. 나는 두 얼굴의 사나이다. 겉으로 포장한 나는 ‘페르소나’ 그 뒤에서 숨은 나는 ‘그림자’다.”
아귀와 고니는 각자 겉(페르소나)과 속(그림자) 시소게임을 하면서 상대를 마주한다. 그런 감정의 변화 속에서 상대의 진실과 허구 사이의 거리가 파악코자 노력한다. 그 거리가 가깝다면 좋겠지만, 멀게 되면 속았다고 분노하게 된다. “동작 그만,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페르소나 - 그림자’ 인간의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마그리트는 그림으로 승화시켰다. ‘보는 미술’에서 ‘생각하는 미술’로 이끌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 La trahison des images(ceci n'est pas une pipe)]”로 자신만의 그림 철학을 만들었고, 그가 주장한 이미지와 텍스트 간의 모순은 우리가 살면서 당연시 여겼던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이에 그의 그림 문법(철학)을 닮고자 내 ‘심금’을 울린 작품을 향해 붓을 들었다.
회사가 서울에서 시골로 이전함에 따라 가장 좋았던 것은 구름을 가까이 마주하는 거였다.
그동안 빌딩 숲 사이로 하늘 보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시골에서는 구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Pooh’ 곰돌이를 닮은 구름에서부터 문자를 형상화한 것 까지, 여기에 오로라처럼 구름(별) 조각이 펼쳐진 장관도 볼 수 있었다. 이런 순간순간을 그림으로 담고 싶었고, 르네 마그리트 ‘심금’이란 작품이 나를 돌아보게 했다.
파란 바탕 위에 구름과 와인잔 하나 그리고 능선 사이로 내려오는 물줄기는 ‘평온’ 그 자체로 내 마음속 판타지를 대변해줬다. 구름을 그릴 때는 진짜 ‘구름’ 같이, 와인 잔은 진짜 ‘와인잔’ 같이 그리고자 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구름과 와인잔 사이의 하얀 경계는 구분이 모호했고, 와인잔의 좌 · 우 대칭을 맞추지는 더더욱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수록 판타지 같은 세상을 현실적으로 그린다는 게 더 모순적이기에 내 그림 수준(스킬)에 맞는 위치에서 ‘보통 x 마그리트' 세상을 그렸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간의 페르소나는 몇 배로 많아졌다. 그렇다 보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횟수도 많아지고, ‘현타’라는 신조어가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간 타인의 시선에 민감했던 한국사람들도 ‘타인의 기준’과 ‘자기다움’ 사이에서 세대 간 분열이 시작되고 있다. 페르소나, 즉 가면을 쓰고 아무리 연기하고 포장하더라도 본질의 변화가 없다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집단생활(사회) 속에서 꾸며진 모습을 추구해야 하는 부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겠지만, 원자화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모두가 자신의 삶에 좀 더 온전히 집중한다면 페르소나도 결국 연극의 일부분이 되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