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아이에게 명상을 쥐어주다. 마크 로스코
걱정 없이 ‘멍’ 때리는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놈이 된다.
그래서 ‘멍’이 깨지는 순간이 제일 아쉽다.
잃은 것 하나 없는데 그 아쉬움은 뭘까?
멍은 쉼이라
쉬지 못한 내면의 ‘혼(아이)’은 멍이라는 터널로 잠시 탈출한다.
탈출의 의미는 내려놓음이다.
회귀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뭔가 규정할 수 없는 채움과 비움,
그 과정 속에 본연의 나를 마주한다.
로스코 작품을 보고 있으면 웃음보다 울음이 먼저 나온다.
왜 눈물을 흘릴까?
내면의 알 수 없는 오묘한 감정 변화 속에
흐르는 눈물은 주체할 수 없고, 기분은 마냥 후련한 체
변태적 감수성이 타오른다.
두 개의 단색이 캔버스에 스미듯 스미지 않는 듯
자연스러움은 단조롭기보다 그 안의
심오함을 담은 그릇같이, 보면 볼수록 빨려 든다.
빨려 들게 하는 그 무엇은 종교적 숭고미까지
느끼게 할 정도니 로스코는 진정 가슴이 있는 작가가 아닐까?
홀로 지낸 시간이 많을수록 물질을 소비하기보단
절제하고 타인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특히 경험적 가치에 좀 더 집중하게 되고
이것을 주변과 나눌 수 있다는 데 더 큰 의의를 두게 되었다.
사실, 물질을 소유해봤자 그것의 의미는 퇴색될뿐더러
나로 인해 그 대상의 가치는 제한적으로 묶이게 된다.
로스코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로스코 작품이 지닌 '소통의 품격'을 타인과 나누고 싶었고,
그가 말하고 싶은 공(空) 한 상태 속 평화로움을
타인과 교류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따라 그려보았다.
로스코 작품을 따라 그려가는 과정은 거칠다.
20호 이상 (나에게) 큰 캔버스 위로 스치듯 스치지 않듯
대형 브러시로 층층이 단색을 채워가는데
붓과 캔버스가 만들어내는 마찰 소리와 내 숨소리밖에 없다.
그를 따라가는 과정은
내면의 나와 이야기하는 그 자체로 고요했다.
단조로운 행동 속에서
지난 1년의 시간을 되짚어보고,
일 년이 지나면
3년 그리고 5년 전 과거로부터 나에게 질문하고
지금의 내가 그 물음에 대답을 한다.
마치 ‘82년생 김지영’과 같이
내속의 나에게 <너는 무엇이니?>라는
물음에 여러 답을 내놓고 있지만,
아직도 답을 못 찾고, 쉬지 못한 체 남겨져 있다.
그래서 로스코 작품을 따라 그려가는 과정은
늘 새롭고 그 앞에서 참회를 하며
또다시 다음을 기약하고 용기를 낸다.
이런 반복된 일상 속 내가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로스코 앞에서
아이를 마주한다.
아직도 헤매는 <나>란 아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