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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신 Dec 03. 2019

끝내 들을 수 없는 이야기

-내 친구 김 00 부디 잘 가시게


대학동창 김 00 본인상 부고를 받았다.
40년 전 대학시절 교내 방송국 활동을 같이 했던  내 친구 김 00이  2주 전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대학 방송국 밴드에 "김 00 사망"이란 공식 부고가  오르자 방송국 선후배들이 댓글을 달며 한 마디씩 했다.



"멋진 경상도 남자"
" 00 선배..
쌍룡 정유 근무할 때
찾아가면 언제나 따뜻하게
챙겨주던 정 많은 선배.
미국 떠나기 전 일산 00 씨
집에서 환송모임 한 일..
너무나 생생한데....
먹먹합니다."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랬었다. 그는 보기 드물게 잘생긴 얼굴에 강한 경상도 말씨로 늘 환하게 웃었다. 자기 아버지 옷임이 분명한  그 당시 귀한 실크남방을 휘날리면서도  한편 수줍어하던  대학 방송국 동기이자 졸업 후에  대기업 직원이 된 동기였다. 이번 소식은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지 20년 동안  전해진 유일한 소식이다.



20년 전, 경상도 어느 문중의  장손인 김 00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겠다고 하자 대학동창들도 다 놀랐고 특히 그의 경상도  문중이 소란스러워졌었다.  문중회의가 소집되었지만 그의 이민 결심을 말리지는 못했다.


나는 그에게 그 일의 전말을 들으며 이런 글을 썼었다.


"(중략) 내 가까운 주변만 돌아보더라도 공교육에 실망하고 사교육비에 가계가 휘청 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자녀교육 때문에 기러기 아빠와 이민 행렬이 이어진다더니 아닌 게 아니라 가까운 동창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동창 중 하나가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고 해 의문이 있었는데 송별회에 참가해서 들어보니 다름 아닌 교육 때문이었다.


"죽어라 일해도 별다른 보상이 없잖아. 돈 없고 빽 없으면 그저 먹고사는 걱정이나 겨우 면할까.. 게다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벌어봤자 두 아이 사교육 내고 나면 뭐 남는 게 있어야지"


그 친구는 IMF 위기가 왔을 때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사회 전체가 어려우니 문제가 더 확실하게 보였고, 그래서 떠날 결심을 굳혔다는 것이다. 나름대로는 꼼꼼히 준비했는지 친구는 몇 차례의 현지답사까지 거쳐 이미 집도 마련하고 일도 구상해놓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하던 중 친구는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친구가 집안의 장손이라 문중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장손의 미국행을 만류했다는 다소 우습고 황당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말이 걸작이었다. 어르신들이 하도 이민을 말리시길래 내가 한마디 했지. 그러면 교육비를 문중에서 다 부담할 수 있느냐고, 좌종이 아주 조용해지더군"


웃을 수만은 없는 한국 현실을 적나라하게 꼬집은 친구의 말을 계기로 그날 모인 동창들은 너나없이 자신이 느끼는 교육의 문제와 자신과의 갈등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봇물처럼 쏟아지는 그들 이야기의 핵심은 ' 과외니 학원이니 이런 것 다 끊고 싶지만 그것마저 안 하면 자식이 3류 대학도 못 갈까 봐 시킨다'는 것이었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말할 수 없이 심경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교육운동을 했다고 하면서도...(중략)


(김정명신 저,  <나도 아이와 통하고 싶다>121~122쪽 자녀교육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에서 발췌. 2002년 동아일보사 발행 )

나는 그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아침 전화를 했었다. " 결정을 이해하는데 앞으로는 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을 위해 살라"고 속절없이 그를 떠나보냈었다. 



그 후 미국 갈 일이 생겨 수소문하여  그를  미국에서 만났다. 이틀 동안 함께 옛날이야기를 반갑게 나누었는데  그는 대학시절처럼 의리는 여전했지만 미국 생활이 녹녹지 않은지 조금은 지쳐 보였다. 팔팔했던 청년이 중년 느낌, 그 무렵 미국도 오랫동안 불경기여서 비즈니스의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 중인듯했다.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떠나는  날 새벽,  눈보라를 뚫고  시카고 공항까지 차를 몰아 데려다주던 그의 옆모습을 보며  그가 미국으로 떠난 후 한국에서 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던 질문,  "행복하냐? 자식 교육은 잘되고 있냐?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고 있냐?" 이 세 가지 질문은   입속에서만 맴돌 뿐 차마 묻지 못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지 몰라 다만 안타깝고 애틋했었다.


그래도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남았으되 그는 먼길을 떠났으니  나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다시는 들을  없을 것이다. 

무정한 사람, 자식 교육이  뭐라고 그 먼 곳까지 가서...



그가 떠나고 20년,  우리 교육과 부모들의 삶은   척박해져 그때보다 더 깊은 오리무중, 심한 각개약진 중이다. 대입 무한경쟁과 기러기 아빠, 저출산과 넘쳐나는 사교육과 스펙 쌓기. 최근엔 부모 찬스와 교육 불평등론까지


그는 미국으로 이민 가서 그가 원하는 삶을 살았을까? 그리고 그렇게 원하던 자식 교육에 성공했을까?
그도 가끔 시간이 날 땐 우리 대학 방송국 생활을  기억했을까?  
그 빛나고 행복했던 시절을!


내 친구 김 00, 부디 잘 가시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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