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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호 Dec 25. 2018

이 상투성을 바라보는 일

J Mascis, [Elastic Days] (2018)

다이노소어 주니어의 제이 마스키스가 세 번째 솔로 앨범 [Elastic Days]를 발표했다.


 제이 마스키스(J Mascis)는 대체로 예측 가능한 지점에 있다. 솔로 프로젝트는 물론, 다이노소어 주니어(Dinosaur Jr.)의 모든 앨범에는 아티스트 고유의 작법이 관통한다. 제이 마스키스는 결코 예상치 못 한 형질을 보여주거나 기대의 사각지대로 진입하는 작가가 아니다. 이 아티스트의 창작은 꽤나 제도적이며 관습적이다. 이러한 연유로 제이 마스키스의 독집들과 다이노소어 주니어에서의 앨범들을 완전히 상이한 작품으로 보는 일, 또는 그의 개별 작품을 디스코그래피 내 다른 작품들과 완벽히 구별되는 별종으로 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모든 솔로 음반들을 어쿠스틱한 제이 마스키스의 앨범이라 칭할 수 있겠으며, 다소 무리하게 언급해서 다이노소어 주니어의 음반들을 과격한 제이 마스키스의 앨범이라 칭할 수 있겠다. 이러한 공속성으로 인해, 보통과는 다른 외피라 할 수 있을 어쿠스틱 사운드의 기능은 실상 제한적이다. 제이 마스키스의 창작 과정은 전과 거의 다르지 않다. 어쿠스틱 사운드는 그저 질감에 차이를 부여하는 정도로 작용한다. 재질을 밋밋하게 만들 뿐이고 조금은 부드럽게, 가끔은 여리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평소 다이노소어 주니어의 잔뜩 왜곡된 일렉트릭 기타 톤이 가리는 아티스트의 선율을 선명하게 부각할 뿐이다.
 

 그래서 [Elastic Days]는 낯익은 작품이다. 제이 마스키스 역시 낯익은 창작자다. 이 존재들은 상투로 가득하다. 혁신은 어디에도 자리하지 않는다. 상투성이라는 요소가 평결에 있어 제동장치처럼 사용되는 대개의 기준에서는 오랫동안 어떠한 갱신이 없는 이 아티스트, 사반세기의 상투가 누적된 이 앨범은 큰 환영을 받기 어렵겠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한가. 속내를 언급하자면 이 논의의 요점은 제이 마스키스의 상투성을 피상적으로 인식하지 않겠다는 데 있다. 그러한 오인에 근거해 아티스트의 저작을 대강 포괄해버리고 범속으로 단정해버리는 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데 있다. 제이 마스키스의 상투성은 달리 판단돼야 한다. 안전한 동어반복이 기어이 한계의 원인으로 확증되고 마는 여타 창작자와는 확실히 상이한 영역에서 이 아티스트를 살펴야 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제이 마스키스의 상투에는 은근하게 안정을 무너뜨리는 행위 또한 내재한다. 충분히 낯익은 그의 창작은 낯설게 하기를 동반한다. 이는 상투에 자극을 가해 앨범과 앨범, 곡과 곡 사이에 생경함을 일으키고 거리를 부여하며 종내에는 매 결과물에 적잖은 독립성을 부여한다. 제이 마스키스가 주는 익숙함은 온전한 익숙함이 될 수 없다.


 제이 마스키스와 다이노소어 주니어를 미국 얼터너티브 록의 권위자로 만든 요인 중 하나는 아티스트가 줄곧 내보여온 불안정성에 있다. 예컨대 제이 마스키스는 갑자기 갖은 음향 왜곡을 투하해 톤의 과격한 변형을 강제한다. 또는 템포를 순식간에 끌어올려 광분을 이끌어내거나, 사운드의 규모를 느닷없이 줄여 완력을 일순간에 제거한다. 가끔은 곡이 완전히 매조지되지 않은 듯한 상태에서 연주를 끝냄으로써 긴장의 점진적이고도 온전한 연소를 막기도 한다. 전통적인 록과 팝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나 그 안에는 위와 같은 돌발적인 움직임들이 있다. 제이 마스키스를 예측하는 행위가 '대체로' 가능한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는 그가 유약하지만서도 잘 들리는 선율을 써낼 것을 안다. 로큰롤과 펑크에 기반해 코드를 제한적으로 사용할 것을 안다. 또한 버스, 브릿지, 코러스로 이어지는 전개 구조의 전형을 취할 것을, 노래를 적당히 부르고 나면 기타 솔로를 펼칠 것을 안다.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돌발을 행할 것까지도 안다. 그 돌발의 양태들은 심지어 우리가 수차례 경험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예측은 거기까지다. 어느 시점에서 어느 변칙이 등장할지와 같은, 특정을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특정한 변칙이 어떠한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내다보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불안정성은 작품의 공기를 독특하게 구성한다. 예측의 현전을 막음으로써 긴장을 조성하고, 감상의 재현을 차단함으로써 생소함을 자아낸다. [Elastic Days]에서는 어떠한가. 오프닝 트랙 ‘See You At The Movies’의 마지막 소절은 완전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이 종결은 이른 단절을 강행하며 그 효과로서 안정을 상실케 한다. 게다가 이는 작품 첫 트랙의 종결부이기도 하다. 제이 마스키스는 곡뿐 아니라 [Elastic Days]의 출발까지도 낯설게 만든다. 이 맥락에서 제이 마스키스 식 클로징의 전범이 들어선 ‘Everything She Said’와 ‘Sometimes’도 함께 예로 들어볼 수 있겠다. 특유의 날카로운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하다 급작스레 곡을 끝내면서 제이 마스키스는 창작자의 행동보다 늦될 수밖에 없는 감응의 적귀를 더욱 더디게 만든다. 그렇게 생긴 발신과 수용 사이의 공간에는, 사운드를 순간적으로 한꺼번에 소거하며 돌연 조성된 무기력이 들어선다. ‘Web So Dense’와 ‘Sometimes’에 놓인 템포의 전환도 살펴보자. 두 곡에서 일어나는 완급의 변화는 호흡을 격동한다. 그 순간에 트랙의 환경과 트랙리스트 상의 분위기 또한 일부 변환된다. 이들은 모두 어떠한 불안정성을 실증한다.


J Mascis - See You At The Movies [LYRIC VIDEO]


  잘 들리는 멜로디를 써내는 송라이터의 기질은 바로 그 지점에서 혜택을 입는다. 매번 통상적이면서도 단조롭게 코드를 전개하고, 간편하며 건조하게 보컬 선율을 조성하는 까닭에, 자칫 동어의 연속으로도 보일 수 있을 제이 마스키스의 음악은 까다롭게 동요하는 요소들을 받아들이면서 감응의 반복으로부터 교묘히 이탈한다. 급변하는 템포, 종잡을 수 없는 종결, 어쿠스틱 사운드에게는 이질적일 수 있는 퍼즈 톤의 기타 솔로 등으로 구성된 불안정한 터치들은 기시감이 짙게 깔린 시간에 미시적인 장면들을 삽입한다. 그러면서 러닝 타임의 구간과 구간 사이에 환기를 일으키고 앨범의 트랙과 트랙 사이에 여운을 이끌어낸다. 멜로디가 가진 고유성은 이러한 낯설게 하기가 이루는 환기와 여운 속에서 강화된다. 이를테면 주위의 전환을 통해 활력을 회복하고, 길게 남는 여향을 통해 지속성을 확보하면서 제 존재를 재차 드러내는 식이다. 이와 같은 행동양식 덕분에 제이 마스키스의 선율 개개는 기시의 늪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현시할 수 있다. 선율의 효용가치도 역시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좋은 멜로디와 불안정한 장치의 조우는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Elastic Day]에서 불안정성이 멜로디와 어떻게 상응하는지 살펴볼 차례다. 가령, 코러스를 마저 완성하지 않고 끝내는 ‘See You At The Movies’의 마무리는 잔향을 일으키며 찰랑이는 기타와 희미한 보컬의 존재를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동시에, 이어지는 트랙인 ‘Web So Dense’에게 긴 여백을 제공함으로써 부드럽게 울리는 현악기와 어쿠스틱 기타가 어렵지 않게 곡의 운을 뗄 수 있도록 유도한다. 러닝 타임 도처에 놓인 이 같은 종결 과정에서의 모호성은 위와 유사한 방식으로 유약한 선율에 힘을 보태고 곡들 간의 전환을 원활하게 한다. ‘Cut Stranger’, ‘Sometimes’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별다른 보강 없이 곡의 막을 내리는 방식은 효과를 발휘한다. 또한, ‘Sometimes’에서 급변하는 빠르기는 간결한 멜로디와 날카로운 기타 솔로에 속도감을 더함과 함께 뒤따르는 트랙들의 활기찬 선율을 위해 기반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역시 세심하게 살펴야 할 지점이다. 물론, 곡마다 푸근한 어쿠스틱 사운드의 한복판을 까칠하게 관통하며 곡 본연의 차분한 선율을 역설하는 독주 기타의 퍼즈 톤, 이따금씩 규모를 격렬하게 키우며 도리어 포크 록의 서정성을 부각하는 드럼 비트 구성도 더불어 중요하게 해석해야겠다. 비정형의 수법들이 가진 효력은 이렇듯 분명하게 존재한다.


 요컨대 기시감으로부터 아티스트의 상투에 대한 오해는 출발한다. ‘See You At The Movies’와 ‘Web So Dense’ 등의 골격을 이루는 한정적인 코드 사용을, ‘I Went Dust’와 같은 곡들에 흐르는 흐리멍덩한 제이 마스키스의 가창을 우리는 아티스트의 전력에서 얼마나 많이 확인했던가. 혹은 ‘Cut Stranger’, ‘Wanted You Around’를 유려하게 만드는 세밀한 기타 리프와, ‘Elastic Days’의 포크 사운드에 녹아있는 클래식 록 스타일과 우리는 얼마나 자주 조우했던가. 대다수의 곡에 들어선, 유약하기 그지없는 보컬 멜로디도, 버스와 코러스 구분이 명확한 전개 구조도, 곡의 중후반부에서 마침내 등장하고 마는 기타 솔로도 이 아티스트의 지난 레퍼토리들에서 얼마나 숱하게 마주했던가. 모두 제이 마스키스의 솔로 앨범들에서, 다이노소어 주니어의 결과물들에서 번번이 경험한 요소들이다. 이들은 기실 필연의 존재다. 그러나 러닝 타임의 기저에 놓인 우연의 서사 속에서 이들은 어떻게 결합하는가. 그 결과는 정말로 단순한 상투의 재현에만 그치는가. 제이 마스키스의 창작에 따르는 심의 주제는 다음과 같을 테다. 매번 반복되는 듯 보이는 제이 마스키스의 음악을 어떻게 새로이 긍정할 수 있는가. [Elastic Days]는 이 질문에 대한 잔잔한 답변이다.
 

 역동적인 창작자는 변증법적으로 움직인다. 자기 규정이 있은 뒤에는 규정에 분열을 제시한다. 그중, 자기와 세계의 근간을 주저 않고 흔들어대는 창작자들의 역동성은 특히나 가시적이다. 이들은 매 창작의 결실로 혁신의 모멘트를 이끌어내고는 이를 단숨에 무너뜨려 새로운 모멘트를 위한 공간을 창출한다. 반면, 사운드를 찬찬히 살펴야 역동성이 드러나는 창작자들도 있다. 제이 마스키스는 이 범주에 해당한다. 대립적인 기술을 꾸준히 제시해 분열을 일으키되 최소한의 자기 근간을 유지하는 한에서 충격이 작용하게 한다. 근간 보존의 행위를 전제하기에 이러한 창작자들의 움직임은 태생적으로 상투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들의 역동성 또한 틀림없이 유효하다는 점에 있다. 이들의 정형화된 기법에는 애초부터 요동하는 비정형성이 포함돼있다. 붕괴, 훼손, 충돌, 이탈의 가치가 지극한 선으로 인정되는 1980년대 말, 1990년대 얼터너티브 신이 제이 마스키스를 대단한 영향으로 취급하는 데에는 분명 그러한 이유가 있다. 동시에 음악과 음악의 결합이 난반사로 이뤄지는 현재의 음악 신이 그를 도외시하지 않는 데에도 물론 그러한 이유가 있다.
 

 그러고 보면 상투적이어도 좋은 아티스트들이 있다. 블루스를 대할 때의 키스 리처드(Keith Richards)가 그렇고 아메리카나를 부를 때의 닐 영(Neil Young)이 그렇다. 이 아티스트들의 뚜렷한 음악 색채 너머에는 은밀하게 상황을 비트는 본능이 놓여있다. 잘 들리는 음악이 전부인 것처럼 내세우지만 곳곳에는 변칙이 숨어있다. 이들의 디스코그래피는 그러한 창작의 연속이었다. 제이 마스키스라는 아티스트를 또다시 긍정할 수 있는 연유를, 그리고 [Elastic Days]라는 앨범을 긍정할 수 있는 연유를 전부 그 맥락에서 확인 가능하다. 작품에는 ‘See You At The Movies’나 ‘Picking Out The Seeds’와 같이 듣기에 큰 위험부담이 없는 곡들이 있으며 ‘Web So Dense’, ‘Elastic Days’처럼 차분하게 가라앉는 곡들이 있다. 또 ‘Cut Stranger’와 ‘Drop Me’처럼 동적인 리듬을 바탕으로 하는 캐치한 곡들이 있다. 그리고 이 사이사이에는 불안정성을 표출하는 장치들이 있다. 조용하고 고요한 음악은 단번에 파악하기 어렵게끔 요동을 감추고, 요동은 내부에서 조심스레, 점진적으로 파흔을 일으킨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제이 마스키스의 음악이다.


-수록곡

1. See You At The Movies

2. Web So Dense

3. I Went Dust

4. Sky Is All We Had

5. Picking Out The Seeds

6. Give It Off

7. Drop Me

8. Cut Stranger

9. Elastic Days

10. Sometimes

11. Wanted You Around

12. Everything She Said


J Mascis - Elastic Days [OFFICIAL VIDEO] Featuring Dina Martina


Dinosaur Jr - Freak Sc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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