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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성 김작가 Mar 26. 2024

행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의도

어떤 방향을 향하느냐에 따라 그 행동의 가치가 결정되는 마음, 의도

천주교 신자에게 사순 시기는, 매우 불편한 기간이다.

자선과 기도 그리고 절제라는 중요한 세 가지를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선과 기도는 평소에도 꾸준히 하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실천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정해진 범위가 있는 게 아니니,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 큰 부담이 되진 않는다. 문제(?)는 절제다.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등등 평소에는 자연스레 했던 행동을 끊어야 한다. 잠시지만 끊는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왜 그렇지 않은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마음 말이다. 먹지 말라고 하면 더 먹고 싶어진다. 사람 마음에 청개구리 한 마리씩은 늘 품고 있는 듯하다.    

  

절제해야 할 것은 주로, 음식을 먹는 거다.

마음의 절제도 물론 중요하다.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내었던, 나쁜 마음을 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마음의 절제이기 때문이다. 음식 먹는 것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다. 음식을 먹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서 금방 알아차릴 수 있고, 가장 절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절제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중요한 부분이 또 있다. 절제한 만큼 자선을 베풀어야 진정한 의미를 실천했다고 본다. 단식한 만큼, 자선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과 성금요일은 ‘금육’과 ‘단식’을 모두 해야 한다. 매주 금요일은 금육을 지켜야 한다. 이외에도 절제하는 삶을 위해, 평소에 즐겨 먹던 것을 참고 봉헌하는 마음을 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순 기간에 술을 끊거나 담배를 끊는다고 한다. 대단한 절제력이다.      


사순 시기에 들어서면,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10년 가까이 됐지만,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그리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지금도 헷갈린다. 한창 지방 출장을 다녔던 시기였다. 먼 지방은, 주말에 행사가 있으면 전날인 금요일에 내려간다. 그날도 금요일이었다. 그냥 금요일이 아닌 성금요일이었다. 부활을 코앞에 둔, 금요일 말이다. 팀원 둘을 태우고 운전해서 내려갔다. 출장 가면 잠을 충분히 자기 어렵고 식사도 제대로 챙겨 먹기 어렵다. 따라서 내려가는 전날 저녁과 당일 저녁을 잘 챙겨 먹는다. 팀원 둘은 내려가면서 뭘 먹을지 서로 대화를 나눴다. 보통은 각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것을 주로 먹는다. 주변 여건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난 오늘 고기 못 먹는 날이다.”

팀원들에게 양해를 먼저 구했다.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한 건 아니지만, 내가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알았던 팀원들이라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하지만 잘 알 듯, 고기 빼면 먹을 게 거의 없다. 어제와 오늘 먹었던 음식을 떠올려봐도 그렇다. 고기가 빠진 식단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다못해 반찬으로 장조림이 나와도 고기 아닌가. 빠질 틈이 없다. 행사장에 도착하고 세팅을 얼추 마무리 지었다. 더 늦기 전에 밥을 먹기로 했다. 번화가가 아닌 관계로 식당 영업을 늦게까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뭐, 먹을래?” 평소처럼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었다. 실무로 고생하는 팀원들에 대한 배려랄까?      


“삼겹살이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메뉴를 말했다.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어? 내 말을 기억 못 하나? 아니면 장난인가?’ 잠시 의도를 파악하려고 생각했다, 선택지가 많지도 않아서 삼겹살 가게로 향했다. 돌판에 기름을 내뿜으며 구워지는 삼겹살이 그날따라 맛있어 보였다. 양옆에는 콩나물과 김치 그리고 버섯 등을 구웠다. 고기를 구워서 가장자리로 빼줬다. 잘도 먹었다. 나는 기름에 볶아진 콩나물과 김치 그리고 버섯을 밥과 함께 먹었다. 티를 안 내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그렇게 한참 고기를 먹고 난 두 친구가 입을 열었다. “왜, 고기 안 드세요?” 그래도 눈썰미는 있었나 보다. 처음에는 “어? 먹고 있어.”라고 에둘렀다. 하지만 아닌 것 같다며, 다시 물어왔다.     


“아까, 나 오늘 고기 못 먹는 날이라고 얘기했는데….”

그제야 두 친구는 두 눈을 동그랗게 열면서, 미안한 마음을 최대한 표현하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 먹고 나서. 자기들이 깜빡했다면서 어떻게 하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된장찌개와 밥 그리고 볶은 각종 채소를 먹어서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래도 미안한 모양이었다. 출발할 때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 것과 자기들끼리만 고기를 먹은 미안함 때문인 듯했다. 정말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하고 나서야 조금 누그러졌다. 다음 날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느냐는 말에 그렇다고 하자, 내일도 고기를 먹자고 제안(?)했다.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얹힌 마음의 짐을 덜어내려는 모양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는 그냥 함께 먹는 게 더 나은 걸까?’ 금육을 지켜야 하는 게 당연히 옳다고 여겼지만, 너무도 미안해하는 친구들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의도적으로 지키지 않으려고 하는 상황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제보다, 이웃을 위하는 마음이 우선된다면 말이다. 자선을 베푸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절제하는 것도 결국, 자신을 향하는 것도 있지만, 이웃을 향하는 마음이 없다면 의미가 깊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느냐?”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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