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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성 김작가 Dec 08. 2024

외침이 말이나 이야기가 아닌 소리로 듣는 사람들에게


혼자 앉아 있는, 시끄럽고 혼잡한 카페 안.

약속만 아니었다면, 빠져 나가고 싶을 정도로 혼잡한 공간에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어려운 소리가, 끊임없이 귀를 때렸습니다. 말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이런저런 부딪힘에서 나오는 소리 등으로 어질하기까지 했는데요. 무엇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소음 속에서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옆 테이블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려 한 거죠. 들리지 않았습니다. 가끔 귀에 들어오는 단어는 있지만, 어떤 내용인지는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때, 또렷하게 들여오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지인이 부른, 내 이름이었습니다.     


아무리 혼잡한 상황에서도, 내 이름은 잘 들립니다.

큰 소리로 불러서일 수도 있지만, 내 이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잘 들립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가끔은, 내 이름과 비슷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기도 합니다. 다른 소리는 아무리 커도 잘 들리지 않는데, 자기 이름 혹은 비슷한 소리에는 귀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죠? 왜 그럴까요? 자주 들어서일까요? 수백, 아니 수천 번도 더 들어본 이름이라 그럴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가설에 더 무게를 실어봅니다.     


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포함한 내 이야기는 잘 들립니다. 왜? 내 것이니까요. 공동체 활동 중, 그룹 나눔을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강당 같은 곳에서 조를 나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데요. 같은 그룹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도 하는 시간입니다. 다른 그룹은 아주 멀리 떨어지진 않지만, 그룹 사람들보다는 떨어져 있게 됩니다. 그룹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데, 어디선가 내 이름 혹은 나와 관련된 이야기가 귀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내 앞에서 말하는 사람보다 거리가 떨어진 곳인데도 말이죠. 왜 그럴까요? 내 이름이고 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는 거죠.     


내 이야기는 어떤 상황에서도 들립니다.

귀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자기 이야기가 아니면 어떤가요? 혼잡한 카페처럼, 아무리 크게 말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소리는 들리지만, 말은 들리지 않는 거죠. 말이 아니라 소음으로 인식할 뿐입니다. 어제도 그런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국민이 외치는 이야기를 소리로는 인식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들리지 않은 겁니다. 아니면 들으려 하지 않았던지요. 왜?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왜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고 여겼을까요? 본분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본분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됩니다.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은 종종 등장하는데요. <검사 외전>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자기의 영위를 위해 후배 검사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검사였는데 정치 야망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감옥에 간 검사는 정신 차리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작전을 구상하고 실행합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법정 장면이 나오는데요. 모든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야망에 사로잡힌 그 사람은 몸부림칩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확인한 사실을, 당사자만 부정하는 거죠.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영화라서 그런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이런 생각을 했는데요. 영화에서만 일어날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며, 뭔가 싶습니다. 아이들도 간단하게 정리하는 상식인데 말이죠. 언젠가 들었지만, 흘렸던 문장 하나를 최근에 만났습니다. 한 커뮤니티에서, 지인분이 공유해주셨는데요.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고 있다는 위압감 때문이었습니다.     


“정치 참여 거부에 대한 불이익 중 하나는 당신보다 하등 한 존재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 플라톤 -”     


어떻게 하는 것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관심을 두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는 것이, 참여가 아닐지 싶습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처럼 말이죠. 세상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답답한 상황이,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정리될지도 모릅니다. 희망이 현실이 되길 바라봅니다. 국민이 마음 모아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하던 사람들이, 내 이야기로 새겨듣는 시간이 하루빨리 오길 기대하고 소망해 봅니다.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 곧 자기 이야기가 될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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