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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서김 Sep 02. 2020

프롤로그

비행의 비자도 모르는 청년, 조종사 되다.

 조종사가 되기로 결심한 건 2016년 3월이다. 당시는 갓 입행한 은행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곧바로 퇴사를 계획하고 있을 때다. 퇴사를 해도 다시 일반 직장인이 되고 싶진 않았다. 어딜 가도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돈은 적절히 줄만큼 주고, 편히 쉴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이 있을까 열심히 찾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몹시 건방지다. 그때는 주 52시간 제도가 시행되기 전이다. 오전 7시 반까지 출근해 밤 10시 반에 퇴근했다. 쉬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렇다고 돈을 조금 받고 싶지는 않았다.


 퇴사를 위해 필사적으로 새로운 직업을 찾던 중 우연히 조종사가 눈에 들어왔다. 조종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때라 왠지 조종사는 많이 쉬고 돈도 많이 벌 것만 같은 환상이 있었다. 훗날 되고 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 당시는 나에게 딱 맞는 직업을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했다. 웃긴 건,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직업으로 조종사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주변에 항공 관련 직업을 가진 지인조차 단 한 명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도피성으로 조종사가 되기를 결정했다.


 3월쯤 은행을 퇴사하고, 7월에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으로 떠난 이유는 조종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다. 조종사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한다. 평균적으로 1~2억의 돈과 1~2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투자를 하고도 항공사에 취업하지 못한 사람들이 꽤 많다.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 자격을 취득하는 방법도 있다.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다.) 이런 모험적인 투자를 단지 직장일이 힘들다고 몇 개월 고민 안 하고 결정했다.
 

 지금은 쉽게 말하지만 당시는 절박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 지옥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이른 아침 출근버스에 탈 때마다 제발 운전기사가 졸아서 사고가 나기를 빌었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누워 2주만 쉬고 싶다는 생각을 늘 품었다. 훗날 은행 동기들에게 들어보니 내가 일했던 지점은 악명 높은 곳이었다. 누군가는 몇 개월 일 안 하고 퇴사한 나를 나약한 놈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몹시 고통스러웠다. 직장생활을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그것도 못 버텨?’라는 식의 언어폭력은 삼가야 한다. 타인은 누군가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나를 은행에서 떠나게 했던 장본인들, 지금은 과장이 되었을 두 C 대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놈(?)들 덕분에 조종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변 조종사 동료들에게 왜 조종사가 되었냐고 종종 물어본다. 어릴 때부터 꿈이었다거나 비행을 좋아해서라고 답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비행하는 게 처음엔 부끄럽고 미안했다. 나는 편히 살고 싶어서 조종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비행을 사랑하고, 자부심이 크다. 적성에도 아주 잘 맞는다. 시작은 우연한 계기였지만, 조종사가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나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뒤 은행에 들어갔다가 지금은 비행을 하고 있다. 주변에 진로나 전공을 고민하는 지인이 나에게 상담을 요청하면 너무 고민하지 말라고 한다. 많은 취업준비생들은 자신이 공부한 전공 안에서만 진로를 선택하려고 하고, 이직을 원하는 직장인은 본인의 업무경력을 내세울 수 있는 곳만 찾는다. 그들에게 내 인생을 얘기하면서 전에 무엇을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원하지 않았던 직업에서 적성을 찾을 수 있고, 우연한 계기로 접한 직장이 인생 직장이라는 확신이 생길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무심결에 이 글을 읽고, 조종사의 길로 들어오는 독자가 생기면 굉장히 뿌듯할 것 같다.


 신입 부기장이 비행을 배우는 과정에서 겪었던 일화, 비행하면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경험을 쓸 것이다. 아직 모든 면에서 부족한 초보 부기장이다. 혹여나 멋진 파일럿의 감명 깊은 비행 에세이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내 글은 조종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저 경력 부기장의 우당탕탕, 좌충우돌 비행 일기다. 기대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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