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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서김 Jan 03. 2021

치앙마이행 비행기를 탄 엄마와 딸

2020년 1월인가 2월쯤 언젠가 이야기.

 추운 새벽,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약 7시간의 비행을 마무리하고 태국 치앙마이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공항에 다다르자 착륙하기 전부터 훈훈한 공기가 비행기 안으로 들어왔다. 참고로 비행기는 밀폐되어있지 않다. 외부 공기는 계속해서 내부로 들어오고 고도가 낮아질수록 더 많이 들어온다. 감각이 잘 발달한 승객은 비행 중 객실 안 공기가 갑자기 습해지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비행기가 큰 구름 안을 통과하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그때 조종사들은 빨리 그 구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아무튼 추위에 약한 나는 겨울의 동남아행 비행을 사랑한다. 특히 겨울의 치앙마이는 방콕처럼 무덥지도 않고, 적당히 따뜻한 편이라 더 좋아한다.

 우리가 착륙했을 때 공항 터미널에 붙어있는 주기장은 이미 다 찼다. 백화점 주차장으로 보자면 매장 입구 근처 주차장은 다 차고 멀리 떨어진 자리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우리 비행기는 관제사가 안내하는 대로 터미널과 붙어있지 않은 원거리 주기장에 주기했다. 주기장에 도착해 비행기 엔진을 끄자 지상 직원들이 비행기 왼쪽 앞 문에 이동식 계단을 붙였다. 곧이어 객실 승무원이 비행기 문을 열었고, 승객들은 계단을 밟고 내려가 계단 앞에 마련되어있는 셔틀을 타고 공항 터미널로 이동했다.

 승객들이 비행기에서 전부 내린 걸 확인하고, 우리 크루들이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한국인 스태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태프는 기장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기장님, 휠체어 탄 승객이 있는데 같이 좀 가도 될까요?”

 보통 우리 크루들은 승객이 다 떠난 다음 마지막으로 오는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나간다. 아마 이번 경우는 전 버스가 거의 찼는데, 휠체어를 탄 손님까지 태울 여력이 없어 그 승객 홀로 남았던 것 같다. 지상직원은 그 휠체어 탄 손님을 먼저 보내고 우리끼리 갈지, 아니면 그 승객과 같이 버스를 타고 빨리 공항을 나갈지 물었다. 기장님은 같이 타겠다고 했다.

 버스에 올랐다. 안에는 두 명이 있었다. 직원이 말했던 휠체어를 탄 승객과 그 옆에 서 있는 한 사람. 휠체어에는 체구가 작은 백발의 할머니가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었고, 옆에는 딸로 보이는 50대 초반의 여성이 있었다. 두 여성은 버스에 올라타는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있던 할머니의 얼굴이 선명히 기억난다. 체구가 작고, 근육이 많이 빠져 앙상했지만 눈이 굉장히 또렷했다. 웃는 상에 인상이 좋으셨지만, 단순히 선하게 생기셨다기보단 생각이 깊어 보였다. 기품이 느껴졌다. 책을 많이 읽으실 것 같았다.

“덕분에 치앙마이에 잘 왔습니다.”

 두 분은 아주 공손히 우리에게 인사했다. 일본 전통 온천의 주인 할머니 같은 공손함이었다.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대개 동남아시아에 여행 오는 한국 어른들은 조용하기보단 왁자지껄한 경우가 많은데 두 여성은 조용했고, 차분했다. 사뭇 이질적이었다.

 모든 게 궁금할 무렵 기장님이 먼저 그녀들에게 물었다.

“두 분, 모녀신가요?”

딸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한국이 추워서 2주 정도 지내려고 왔습니다.”

 ‘대단하다.’

 속으로 감탄사가 나왔다. 당찬 20대도 아니고, 중년과 노년의 여성이 가이드나 젊은 사람 없이 단 둘이서 비행기를 타고 치앙마이까지 오다니.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엄마가 떠오르고 비교됐다. 엄마에게 해외여행이라곤 아버지와 함께한 패키지여행이 전부다. 골반이 안 좋아 장기간 비행기에 앉아있는 걸 못 견디신다. 외국음식을 많이 안 드셔 봐서 외국에서 먹는 음식은 입맛에 안 맞아해 여행을 즐기시지도 않는다. 여행의 재미를 느껴보지 못하셨다. 그래서 그 당시 내 눈 앞에 있는 두 여성이 멋있었다. 여행의 재미를 아는 어른들이었다. 젊은 사람이 영어를 잘하면 ‘아 그런가 보다.’ 하고 그만이지만 나이 든 사람이 영어를 잘하면 멋있게 보이는 그런 느낌이었다. 할머니는 휠체어까지 탔는데..

 이런 상황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내공으로 보아 아마 처음 온 것도 아닌 듯싶었다. 분명 처음엔 두렵고 힘든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만났을 때는 그 모험을 당당히 헤쳐낸 후 누구보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물가가 싸고 따뜻한 곳으로 놀러 와 얼마간 휴양을 하고 한국이 따뜻해지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진정으로 어른들에게 필요한 여행이다. (그 전에도 중년 부부들이 겨울에 따뜻한 나라에서 한 달 정도 골프 리조트에서 숙박하면서 골프 치고 오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년, 노년 여성 둘이서 배낭여행객들이 많이 오는 치앙마이에 온다는 건 왠지 다르게 다가온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금세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휠체어는 내릴 때 오래 걸릴 것 같아 우리가 먼저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모녀에게 인사했다. “푹 쉬고 돌아오세요.”

두 분은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난 더 숙였다.

두 분, 건강하세요. 내년에도 또 만나요.

P.S. 아..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하늘 길이 막혀 못 가셨겠다. 잘 지내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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