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많이 타 본 승객이라면 종종 승무원이 커튼으로 기내 앞 쪽 공간을 가리는 걸 본 적 있을 것이다. 대체로 둘 중 하나다. 객실 승무원들이 승객의 눈을 피해 편히 쉬고 싶을 때, 혹은 칵핏(Cockpit; 조종석) 문을 열 때. 칵핏 문은 조종사들이 밥을 받거나 화장실을 이용할 때만 잠시 연다. 그 외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니고서야 항상 잠겨있다. 칵핏 문이 열린 동안 승무원은 승객들이 칵핏 내부를 보지 못하게 커튼을 펼쳐 앞 공간을 가린다.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커튼을 잡고 서 있다가 칵핏 문이 닫힌 걸 확인하면 커튼을 걷고 본인 할 일을 재개한다. 조종사와 객실 승무원이 의사소통할 때도 문은 닫혀있는 상태로 기내 통신장비를 통해 할 말을 주고받는다. 911 테러 이후 생긴 규정이다. 그 날 이후 조종사와 승객은 더 이상 비행기 안에서 대면할 수 없다. 객실 승무원들이 우리 조종사들의 안전을 위해 승객과 우리 사이를 철저히 차단한다. 테러 이전에는 가족이 비행기에 타면 칵핏 내부에 들어와 칵핏과 비행기 밖 하늘을 구경하는 낭만이 있었다던데, 그 시절 비행하지 못해 아쉽다. 조종석에 앉아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그 하늘을 공유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훈련 부기장에서 정식 부기장으로 승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중국 하이난 섬의 싼야 공항을 퀵턴*으로 다녀오는 길이었다. 비행은 가까스로 문제없이 해내지만 그 외 비행 생활에 필요한 팁들은 잘 모를 때다. 회사로 말하자면 아직 신입직원 티를 못 벗은 상태였다. 신입직원이 신입 티를 벗는 건 언제쯤일까. 업무를 능수능란하게 잘할 때? 그보단 직장생활에 관련한 팁들을 전부 익혔을 때일 것이다. 가령 회사 근처 맛집은 어디인지, 사무실 파벌은 어떻게 형성되어있는지, 언제 화장실에 가야 눈치 보지 않고 오래 다녀올 수 있는지, 홀로 짱 박혀(?) 있을 만한 곳은 어딘지 등 '업무와 관련 있지 않지만 꼭 필요한 것들'을 다 익혔을 때 더 이상 신입 티가 나지 않는다. 그 당시 나는 초짜 부기장이었던 터라 그런 팁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신입 티가 팍팍 흘러넘쳤다.
같이 비행한 기장님과 나는 싼야 공항에서 인천 공항으로 돌아오는 비행을 맡았다. 인천 공항에서 싼야 공항에 갈 때는 다른 기장님, 부기장님이 비행했다. 한 비행기에 총 4명의 조종사가 탔다. 싼야에 갈 때 우리 둘은 승객석에 앉아 쉬면서 갔고, 인천으로 돌아올 때 칵핏에 앉아 비행했다. 밤 9시쯤 인천 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4시간 후 싼야 공항에 도착했다. 승객들이 다 내리고, 칵핏 문이 열렸다. 비행기를 끌고 온 기장님과 부기장님이 피곤한 얼굴로 칵핏을 빠져나왔다. 수고했다는 인사를 하고 기장님과 내가 칵핏으로 들어갔다.
그 날 같이 비행한 객실 사무장님은 나보다 한 살 어렸다. 친절하고 웃는 모습이 예뻤다. 지상에서 바쁘게 비행준비를 하고 있는데 불쑥 칵핏에 들어왔다. 참고로 승객이 탑승하지 않았을 땐 칵핏 문을 열어 놓는다. 사무장님은 졸지 말고, 안전비행 부탁한다며 우리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새벽 비행에서 커피는 기호식품이 아닌 필수품이다. 본인도 바쁜 와중에 우리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알아서 커피를 준비해 준 사무장님이 너무 고마웠다. 거기다 그냥 커피도 아니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니. 객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만들기가 번거롭다는 말을 다른 객실 승무원에게 들은 적 있다. 친절한 사무장님은 우리가 부탁하기도 전에 미리 그 수고를 했다. 뭐라도 답례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이럴 때 제일 미안하다. 빵이라도 사 올걸.
비행 준비를 마치고, 승객을 다 태운 뒤 오전 2시쯤 인천을 향해 이륙했다. 33,000피트(해발 약 10km) 순항고도에 금방 진입했다. 비행기는 상승을 멈추고 수평비행을 시작했다. 날씨도 좋고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새벽이라 승객 대부분은 자고 있을 것이다. 객실 승무원들도 한 숨 돌리고 전용 좌석에 앉아 쉬고 있을 것이다. 기장님과 나도 긴장을 풀고, 조종석에 편히 자리 잡았다.
갑자기 아랫배에 불편한 기운이 감돌았다. 빈 속에 차가운 커피가 들어가 장이 놀란 걸까. 그 신호가 왔다. 아직 참을만했다. 인천 공항까지 남은 시간은 약 4시간. 길지만 한 번 참아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밤을 새우는 비행이라 눈꺼풀이 조금씩 감겼다. 졸음이 쏟아지는데, 아랫배는 간헐적으로 아팠다 가라앉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랫배 통증은 가라앉기는커녕 더 자주 요동친다. 졸린데 똥 마렵다. 최악의 육체적 고통이었다.
1시간 정도 지난 후, 그때까지 수없이 고민하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화장실에 가기로 결정했다. 기장님에게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기장님은 통신장비를 통해 부기장이 화장실에 갈 거라고 객실 승무원들에게 전달했다. 졸고 있었을 사무장과 막내 승무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승객들과 조종사인 내가 만나지 못하도록 앞 쪽에 커튼을 칠 것이다. 이후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 일을 보는 동안 승객들이 화장실로 못 오게 화장실 문 앞에 서서 나를 지킬 것이다.
칵핏 문을 열고 나왔다. 둘이 웃으면서 나를 맞이한다. 아직 내가 작은 일을 볼지 큰 일을 볼지 그들은 모른다. 사무장님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발 안 친절해도 되는데 너무도 친절하고 예의 있게 인사한다. 멋쩍게 인사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기내에서 화장실을 이용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매우 좁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객실 승무원들이 일하는 갤리가 있다. 즉, 화장실 바로 앞에서 여승무원들이 내가 나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 큰 남자가 큰 일 보는데 문 밖에 젊은 여자 둘이 지키고 있다. 몹시 수치스럽다. 나이차가 많으면 그나마 덜 수치스러울 텐데 슬프게도 문 밖의 두 여성은 나와 또래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화장실에서 일 보는 동안 사무장님과 막내 승무원은 커튼을 잡고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시 ‘내가 저 남자 똥 싸는 거 망보려고 승무원 하고 있나’ 하고 자괴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미안하고, 쪽팔렸다.
일 보는 내내 불안했다. 혹시나 내가 만든 불쾌한 소음이 밖에 들릴 수 있다. 아니면 내가 만든 혐오스러운 냄새가 밖으로 새어나갈 수도 있다. ‘생리현상이라 어쩔 수 없어!’라고 변명하고 싶다. 그 상황에서는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이렇게밖에 비행기를 못 만든 보잉(비행기 제작사)이 원망스럽고, ‘객실 승무원들은 조종사가 똥 누면 문 밖에서 지켜야 한다’라는 규정(실제로 저런 규정은 없다.)을 만든 국토부 사람들이 미웠다. 어쨌거나 일을 마치고 나왔다. 기분 탓인지 둘은 피곤한 얼굴로 커튼을 잡고 서 있었다. 내가 작은 일 보고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짜증 났나? 나를 승객들로부터 보호해준(?) 분들이기에 너무도 고마웠지만, 창피한 마음에 쳐다도 안 보고 ‘수고하세요’라고 말하고 재빨리 칵핏으로 들어왔다.
이 일화를 동료 부기장들과 얘기한 적 있다. 같이 훈련받은 부기장 중 훈련 때부터 화장실에 자주 가서 '똥x이’라는 별명의 동료가 있는데 역시나 기내에서도 자주 화장실을 간다고 한다. 갈 때마다 창피하다고 한다. 다른 부기장은 일본제 약을 들고 다닌다고 했다. 그걸 먹으면 아랫배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한다. 약 이름이 ‘스탑!’ 같은 느낌이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배 아픈 거 참는다고 약까지 먹기엔 아닌 것 같다.
이제는 출근 전에 꼭 화장실에 다녀와 기내에 들어가기 전 배를 비우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도 비행 가방에는 늘 향수를 챙긴다. 혹시나 화장실에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냄새를 없애기 위해. 기내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볼 때면 변기 아래에 휴지를 미리 깔고, 배에 힘을 주는 동시에 Flush 버튼을 눌러 소음과 냄새를 최소화한다. 점점 신입 부기장 티를 없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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퀵턴 : 목적 공항에서 체류하지 않고 곧바로 돌아오는 비행. 주로 국내선이나 짧은 국제선 비행을 퀵턴으로 다녀온다. 반대 개념은 ‘레이오버 비행’이 있다. 주로 장거리 노선에 해당하고, 이때 조종사와 객실 승무원은 현지 지역에서 체류(레이오버)하고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