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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맛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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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숙 Oct 15. 2019

오백 원어치 행복

트램펄린과 떡볶이




"ㅇㅇ아 오늘 방방 탈 수 있어?"
"웅웅! 나 어제 심부름하고 삼백 원 받았어. "
"ㅁㅁ도 갈 수 있어? "
"난 못가 ㅠㅠ 난 용돈 다 썼어. "
"야아~ 오늘 가자고 약속했잖아. 엄마한테 달라고 해봐"
"안돼. 울 엄마 얼마나 무서운 데. 나 백 원이 모자라. "
"ㅁㅁ아, 그러면 내가 백 원 빌려줄게. 오늘 가자.”
"정말???"
"웅 대신 꼭 갚아야 한다. "




커다란 트램펄린 두 개를 놓고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아이들에게 삼백 원을 받는 할아버지가 작은 소도시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곳은 순식간에 우리들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열 살의 우리는 그저 친구들과 하굣길에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이라던가 ‘칵테일 사랑’ 등 그 당시 최신가요를 목청 높여 부르며 걷기만 해도 재밌었다.
놀이터나 공터는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고양이 세수로 대충 눈곱을 떼고 아티스 운동화를 신고 해맑게 달려 나가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만 걸면 그 날의 놀 준비는 완료되었다.
바깥이 아니면 서로의 집에 가서 각자의 종이인형과 마론인형을 가지고 공주놀이를 하고 있으면 엄마가 간식을 이것저것 챙겨주어 몸만 나가도 충분히 하루 종일 배를 곯지도 않고, 재밌게 놀 수 있었다.
하지만 트램펄린(우리는 방방 뛴다고 방방이라 불렀다)을 타기 위해선 항상 호주머니 속의  짤짤 소리를 내는 동전 삼백 원이 있어야 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노는 데 돈이란 것이 필요했다.


태어나서 돈을 갈구하는 경험은 열 살 인생 동안 처음이었다.
물론 그 당시 여자 아이의 놀이에는 한 장에 몇십 원 하는 종이인형과 제법 비싼 마론인형이 있었지만 그것은 한 번 마련하면 마르고 닳도록 쓰던 영구재이고 내 손에서 나가는 돈이 아닌 특별한 날 부모님이 사주는 선물에 가까웠다.

방방 아저씨가 자리를 잡은 이후로 우리는 백 원 이백 원에 그날의 희비가 교차했다.
열 살의 우리에게 주머니 속의 삼백 원은 1방방이었다.

우리들은 매일의 1방방을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다.

하루하루 1방방을 하기 위한 삶은 생각보다 치열하고 만만치 않았다.
성적으로 딜을 해 용돈 자체를 끌어올린 머리 좋은 아이, 원래 부자인 애, 엄마에게 받아낼 때까지 징징대는 징징이 타입 등등 각자 여건에서 최선을 다 했다.
나는 기본 용돈이 없이 심부름할 때 받는 잔돈이 내가 보통 가질 수 있는 돈의 전부였다.
일일 1방방을 실현하기 위한 나의 노력은 몸빵이었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그 당시 초 히트를 쳤던 재능교육의 ‘스스로 어린이 송’과 같이 엄마가 시키기 전에 할 일을 찾아 하고 심부름을 계속 찾았다.

엄마를 졸졸 좇아 다니면서 오분에 한 번씩 필요한 걸 물어댔다.
재능교육 노래와 다른 것은 나는 그 후에 심부름값 명목으로 돈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심부름을 한 다음에는 엄마한테 빌려준 적도 없는 돈을 달라고 채권자가 되어 배를 바닥에 빙글빙글 돌려가며 질질 짜 댔다.

뭐 어쩔 수 있나.  나는 방방을  타고 싶었고 돈은 쉽게 벌리는 게 아니었으니.

한동안 나의 일상은 방방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네에서도 뺑뺑이에서도 느낄 수 없던 스릴이 방방에는 있었다.
방방은 도움닫기 하나면 나를 누구보다 높이 공기 중으로 보내주었다.
삼백 원의 자유는 짧고 굵고 그리고, 배를 꺼트렸다.

새가 된 듯 중력을 잊고 방방 떠다니다가 방방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고 나면 중력이 냉큼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는 것 같이 두 다리가 무거웠다. 그리고 배는 사정없이 고파댔다.
딱 그 찰나에 우리는 이백 원이 더 필요했다.
장사 수완이 있으셨던 방방 노부부는 방방 옆에 트럭 떡볶이를 바짝 붙여놓으시고는 할머니가 떡볶이를 판매했다. 떡볶이는 원래 한 접시에 삼백 원이지만 방방을 타면 무려 백 원을 할인해주었다.
집에 가면 바로 저녁을 먹겠지만 배도 고프고 돈도 덜 받는 데다 방방 주위를 강렬히 맴도는 떡볶이의 냄새는 안 먹고 지나갈 수 있는 강인한 의지력의 꼬맹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초록색 플라스틱 접시를 비닐에 싸서 설거지 없는 효율성을 자랑하는 방방 떡볶이는 얇은 밀떡에 소스에 푹 절여져 있는 파가 간혹 있던 평범한 떡볶이였다.
혀 끝이 조금 매운, 매콤 달달한 맛과 어린 입맛에도 조미료가 잔뜩 들어갔음을 느끼게 하는 소스 맛은 열심히 체력 소진한 우리들에게 일품이었고, 우려내고 또 우려내어 흐들흐들한 파랑 먹으면 그것이 또한 훌륭했다.

1방방만으로도 주머니가 항상 힘든 우리들은 넷이서 이인분이나 많아봤자 삼인분을 시켜 나눠먹었다.

항상 조금 모자란 양에 항상 감질나게 끝났고 어느 때는 떡볶이를 할인받기 위해 겸사겸사 방방을 타기도 했다.


방방과 떡볶이의 코스를 마치고 서로 안녕 안녕하며 집에 가는 길에는 방금 먹었던 떡볶이 색깔의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면 열 살의 나는 약간의 노곤함과 떡볶이 조미료 맛의 여운이 혀에 남아 마음에 행복이라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별 것도 아니고 생각해보면 오히려 부실한 떡볶이였지만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가끔 그 맛이 생각난다.

그런 단순한 행복을 지금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그때의 오백 원의 행복은 지금은 어떤, 얼마큼의 비용을 지불하면 다시 느낄 수 있을지 간혹 방방과 떡볶이의 열 살을 생각하며 가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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