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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맛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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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숙 Jan 30. 2019

팝콘이란 무엇인가

일러스트 음식 에세이


내 나이 다섯 하고 두 살 더 먹었을 때의 이야기다.


초등학교 입학 전의 우리 집은 다섯 식구 단칸방의 조촐한 살림이었다.

엄마는 겨울이면 모두 잠든 가족들을 뒤로하고 조용히 연탄을 갈러 나갔다 오셨고, 그럴 때면 엄마 옷에 묻어온 찬 공기가 이불 사이로 스륵 몸을 묻는 게 잠결에도 느껴지던 시절이다.

7살의 나는 가난의 부끄러움이 어렴풋이 두 뺨의 하얀 버짐 속에 피어나고 있었지만, 사실 아무래도 좋았을 시절이다.

그저 날 밝으면 나가서 코를 묻히고 또 묻혀 하얗게 코팅된 두 소매를 가지고서 하루 잘 뛰어놀면 그만인 세월이었다.


그리고 요새 말로 미드!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외화와 주말 밤에 하던 명화극장을 참으로 좋아했다.

노랑머리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 나오는 외화가 7살 꼬마의 마음을 훔쳤었더랬다.

시골마을 단칸방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외화는 정말 말 그대로 이 세상 것이 아니었다.


외화 속 주인공의 집 창가에 걸려있는 아름다운 패브릭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면, 주인집 아주머니의 번듯한 이층 양옥집에 달려있는, 보기만 해도 우울감이 들던 퉤퉤한 색의 두꺼운 커튼과는 견줄 수가 없었고, 라임 그린빛의 잘 깎여져 있는 화면 속 잔디는, 주인집의 내가 좋아하던 사루비아 잔뜩 핀 정원과는 또 다른 윤택함이 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푸른 눈에 바짝 올라간 속눈썹과 연약한 색 홍조의 사람들.


일곱 살의 나는 퍼프소매의 원피스를 갖고 싶어 하던 빨간 머리 앤의 앤처럼 그런 것들을 동경했었다. 그중 시골마을에서도 시도 가능하리라 짐작하고 엄마에게 끈질기게 나의 꿈에 동조하라고 떼를 쓴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팝콘이라 부르는 음식이었다.


그것은 새하얗고 몽글몽글한 모양이지만 살살 녹는 솜사탕의 질감이 아닌 바삭바삭하는 소리가 생김새와는 또 달라 몹시 구미를 당기게 하였다.

잘 깎인 잔디도 아니고 어린 눈에도 제법 비싸 보이는 패브릭의 커튼도 아니니까 충분히 조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있었을게다.


나는 한동안 엄마에게 졸라댔다. 시장을 가는 길에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저녁 먹을 때 괜히 상상 속의 팝콘 맛과 비교하여 딴죽을 걸고, 엄마가 기분 좋아 보이는 틈에 엄마 등에 매달려 무던히 끈질기게도 팝콘을 해달라고 했다.  


어지간히도 졸랐던지 어느 날 엄마는 슈퍼에서 찾아왔다면서 투명 봉지 안에 든 무엇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먼지가 두껍게 쌓였던 것을 닦아낸 듯한 낡아진 패키지 안에 든 말라빠진 옥수수들.

나는 보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던 것 같다.


‘엄마, 팝콘은 이게 아냐!! 이건 너무 딱딱하잖아! 팝콘은 하얗고 몽글몽글한 거라고!’

엄마가 설명해주었다. 이걸 프라이팬에 볶으면 팡팡 튀면서 하얗고 몽글몽글하게 된다고 하더라. 팡팡 튀어서 팝콘이랜다.

펑펑 울다가 간신히 울음을 멈추면서 이미 빈정 상해 버린 엄마 눈치를 보며 얼른 부엌으로 향했다.  

엄마는 엄마가 여고생이었을 때 단체 관람으로 <십계>를, 아빠랑 데이트했을 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간 것이 그때까지의 유일한 극장 구경이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엄마도 그때까지 팝콘을 직접 먹어봤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엄마도 옥수수 씨알 같은 팝콘 봉지를 사며 제법 당황하지 않았을까?


뒤에 조악한 폰트로 써진 파란색의 레시피를 보며 프라이팬에 부단히도 볶아댔다.

하지만 떼쓰는 아이의 소원은 원래 안 들어주는 거니까 당연한 건지 아무것도 부풀지 않았다.

전혀 튀지도 않고 잠잠한 옥수수 씨알들은 몇몇 개는 고대로 탄 냄새를 냈고 서너 알 정도가 병아리 눈곱만큼 부풀다 말았다.

엄마도 만들다 지쳤는지 같이 기대했다가 실망했는지 그도 아니면 아이 장단에 이 정도 맞춰줬으면 됐다 싶었는지 탄 거랑 조금 성공한 팝콘 비슷한 몇 알을 접시에 담아 방바닥에 놓고 다음 집안일을 위해 휙 나가버렸다.

나 역시 처음 대성통곡을 하던 때와는 달리 엄마 눈치를 보면서 더 이상 보채지도 못하고 한알 한 알 입에 집어넣었다. 그것은 마르고 탄 옥수수 씨알 맛, 아주 조금 생긴 하얀 부분은 간이 하나도 안된 버석한 이도 저도 아닌 맛이었다.


엄마는 옆에 앉으며 그렇게 조르던 팝콘 맛이 맞냐고 물어보시고는 고개를 좌우로 무겁게 흔드는 나를 보며 설탕 종지를 슬금 밀어주셨다.

팝콘 맛이 맞냐고 두어 번 물어보시면서 같이 몇 알 집어 맛보시더니 도로 뱉어내던 엄마.

원래 팝콘의 맛이 뭔지도 모르면서 우걱우걱 씹어보려 했던 나.


진짜 팝콘의 맛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친구 따라 얼레벌레 간 극장에서 경험했지만 나의 최초의 팝콘의 맛은 외화와 그걸 동경하던 나의 반짝이던 눈과 엄마랑 같이 몇 알 집어먹었던 쌉쌀한 탄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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