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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맛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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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숙 Feb 07. 2019

수요일의 손님과 버드와이저

일러스트 음식 에세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내 눈은 뒤집어졌다. 

세상은 반짝이는 것 투성이었다.

엄마가 사준 활동하기 좋은 티셔츠, 감색 베이지색 위주의 면바지, 3년 동안 내 키가 무럭무럭 자랄 거라 믿으신 엄마의 야심이 불타는 아주 낙낙한 교복, 흰색 운동화 그리고 순면으로 된 촌스러운 꽃무늬 팬티와 짝이 안 맞는 브래지어가 다였던 나에게 대학생활은 세상의 반짝임에 눈이 홀리며 시작했다.

미니스커트, 가죽치마, 화려한 프린트의 원피스, 쿨해 보이는 민나시, 스키니진, 러플이 달린 블라우스 등등 옷은 사도 사도 부족했고 쇼핑의 전리품들을 한껏 뽐내기에 술자리만 한 것이 또 없었다.


그리고 그 술자리에서는 술과 안주의 환상 콜라보의 신세계를 영접했다.

엄마 밥, 급식밥, 매점 간식이 식생활의 전부였던 나에게 나쁜 남자, 나쁜 친구가 더 매력적인 것처럼 안주의 세계란 짜릿짜릿했다.

 

소주의 첫맛은 알코올램프 맛이었지만 한입에 홉 털어 넣고 달래주는 안주 한입은 소주와 대비되어 극적으로 맛있었다. 지갑 사정 빤한 동기들끼리의 술자리에서 안주빨 세우지 말라는 지탄을 피하기 위해 코를 막고 털어마시던 소주가, 아침해를 보며 감자탕에 해장술을 하는 경지까지 가는 것은 정말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먹는 이야기로 샜는데(음식 에세이에서 음식 이야기로 이야기가 새다니 놀랍다) 대학생이 되어서 해보고 싶었던 중 하나가 바로 아르바이트였다.

내 손으로 벌어서 용돈에 보탬이 되야지라는 기특한 생각을 했었을지, 화장품, 옷, 유흥비로 탕진해야지라고 생각했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개 나의 아르바이트비는 옷값, 화장품 값, 식비 등등으로 탕진을 했다.


아무튼 나는 탕진을 하기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나의 노동의 무대는 아파트 단지의 ㅇㅇ호프였다. 두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작지 않은 규모의 호프집이었다.

여 사장은 혼자서도 쏟아져 나오는 주문을 척척 만들어내었고, 남 사장은 키도 크고 행동거지가 단정한 데다가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젠틀함과 친근함을 둘 다 놓치지 않았다. 특유의 온화함과 친근한 성품 탓에 단골이 제법 많은 북적북적 한 곳이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다. 수요일, 항상 여섯 시에 오는 손님이었다.

두 명의 손님은 언제나 서로 깍짓손을 하고 천천한 걸음과 몸짓으로 출입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익숙한 듯이 이 가게에서 제일 명당자리에 앉았다. 움푹 들어간 공간의 사인 좌석은 어느 정도 안락하고 무리끼리 이야기하기 좋은, 오후에 저무는 햇볕이 잘 쏟아지는 따뜻한 자리였다.

햇볕을 받으며 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반짝이며 두 노부부는 소담히 자리를 잡았다.

항상 주문은 남 사장님이 받으셨다. 사장님과 노부부는 별 다를 것 없는 담소를 나누고는 항상 버드와이저 두병을 주문하고 두부부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천천히 버드와이저를 비우는 동안 이 노부부는 이 세상에 사람이라고는 앞에 앉아있는 사람밖에 없다는 듯이 조용히 응시하고 둘만이 들릴 만큼의 호흡으로 대화를 나누다 가곤 했다.

마치 쳐다보지 않으면 당장 스러질 환상 같은 것처럼, 서로를 쳐다보는 시선조차 의식하지 않고 숨을 쉬듯이 으레 당연한 듯이 서로를 바라본다.


나도 그 찬찬한 동작과 호흡에 동화되어 나의 시선을 들키지 않도록 무생물의 가구처럼 일 없이 구석에 서서 바라보았다. 여름 특유의 냄새와 비스듬히 저무는 햇볕의 색깔과 에어컨 바람으로도 숨길 수 없는 여름의 더위 사이에 노년 부부의 맥주타임은 아스라한 아련함까지 맴돌았다.


젊은이의 서로를 탐하는 눈빛도, 생활에 바래버리고 지쳐 빛을 잃어버린 눈빛도 아닌, 평정하게 서로의 존재를 오롯이 받아들이는 시선. 그 시선을 획득하기 위해 이 노부부는 얼마나 오래 시선들을 중첩시켰을까? 

노부부는 지나온 세월 동안 희, 노, 애, 락을 잘 두들겨 불순물은 조심스레 걷어내고, 주름들은 서로의 손에 옮겨 담았을 것이다.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고 얻은 온후함과 따스함이 이곳, 쓸데없이 평범한 호프집구석에서 넘실넘실 넘쳐서 멋모르는 애송이 스무 살에게도 한껏 나눠주고 있었다.


‘멋있지 않니?’

노부부에게 눈이 부셔 뒤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내 뒤에 서 있던 남 사장님은 주방에서 씩씩하게 음식을 만들어내고 있는 여사장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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