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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ae Shin Jul 16. 2023

오성과 한음

오성이 뚫은 창은 어떤 창일까?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동화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지역과 세대를 아울러서  다양한 소재와 재치로 우리에게 따뜻한 감성과 교훈을 줍니다. 하지만, 익숙한 결말과 구성으로 지루하기도 합니다. 이 메거진에서는 그 뻔한 이야기들을 건축가의 시선으로 새롭게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어린 손으로 뚫은 창

오성이 옆집 담장을 넘은 감나무의 감을 되찾기 위해 지체 높은 옆집 대감님 방에 고사리 손을 넣은 이야기는 오성 이항복의 유머 감각과 자신감 있는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듣고, 어른들의 권위와 사회의 틀을 당차게 격파하는 모습이 묘한 쾌감과 뿌듯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이야기 속 오성도 어린 나이였고 이야기를 접했던 당시에 나도 어린 나이였지만, 어린이가 문을 뚫고 손을 불쑥 들이미는 장면은 어색하지도 않고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아시아를 벗어난 지역의 사람들은 의아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어쩌면 요즘의 아이들이라면 어린이가 문이나 창을 맨 손으로 뚫는다고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문이나 창에 끼워진 유리를 깨는 장면들이 나오더라도 특별한 훈련이나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위험한 행동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린 오성이 창을 뚫는 것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이해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 창의 재료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성은 종이 창을 뚫었다.

오성 이항복 ( 1556 - 1618 ) 조선초기의 문신


종이

종이는 서기 105년 경 중국의 채륜이 제지술을 완성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는 3~4세기경 전래되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축물에 종이가 사용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얇고 빛을 투과하는 재료인 종이는 책 만드는데 사용함과 동시에 채광을 위한 창의 재료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유리가 보물과 같이 값비싼 재료였던 시기에도 채광을 위한 창의 재료로 사용된 것을 보면, 아무리 비싼 고급재료라도 채광을 위해 건축재료로 사용했다. 어두운 실내에 약간의 채광이 가능하다면 책을 만드는 귀한 종이라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유리보다 더 이른 시기에 더 널리 사용했겠다.

종이 제작 과정 ( 명나라시기 그림 )


건축재료로 사용된 종이와 유리

유리는 기원전부터 창의 재료로 사용되었던 로마시대의 창유리가 유물로 발견되어 물리적으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종이로 만든 창은 유물이 남아있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실망은 이르다. 집 모양으로 만들어진 삼국시대 토기들과 중국의 집 모양 토기를 살펴보면,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창과 문을 찾을 수 있다. 그 중에는 널판으로 만들었을 나무문도 있지만, 얇은 살들이 표현되어 종이를 붙였을 것으로 보이는 창과 문도 보인다.

(좌) 가야의 집모양 토기 (우) 로만 창유리 / 웨일즈 국립박물관


단순한 채광기능 외에 종이창으로 온실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초기 세종부터 세조까지 궁중음식을 담당하던 전순의의 산가요록에는 종이온실을 만들어 겨울철에 신선한 채소를 생산했다는 ‘동절양채’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온실을 만드는 자세한 기록이 있는데, 삼면을 막고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하고, 남면은 살창을 달고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는 내용이다. 종이를 단열과 채광의 재료로 사용했던 것이다. 2001년 발견관 산가요록의 기록으로 세계최초의 온실로 알려진 1619년의 독일 하이델베르그 온실은 최초의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했다. 금속활자에 이어 여러 가지로 속상한 독일이다. 중국의 한나라나 로마시대에도 겨울철 식물 재배를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산가요록’의 내용처럼 제작방법이 구체적이지는 않다고 한다. 

산가요록(15세기 중반), 겨울철 채소를 키우는 방법과 온실제작이 설명된 동절양채(冬節養菜) 부분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동궐도에 표현된 '창순루' ( 창순루는 정조 때 사용한 온실 )

20세기를 지나면서 유리는 평활도와 투명성이 높아졌고 무엇보다 1960년대 float glass의 등장으로 기존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의 모든 건물은 투명하고 커다란 유리로 창을 만들게 되었다. 비록 앞으로의 세대들이 어린이 손으로도 쉽게 뚫리는 종이로 만든 창을 사용하지는 않겠지만,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는 종이가 수 천년동안 인류에게 밝은 실내 빛 환경을 제공해주는 중요한 건축재료였음을 전해줄 것이다.


오성이 창을 뚫고 손을 넣었던 옆집의 터는 지금 서촌에 있다. 그 집은 본래 권율의 아버지인 권철의 집으로 후에 권철의 손녀사위가 된 이항복이 물려받았다. 오성은 자신의 또 다른 호였던 필운(弼雲)을 집 뒤에 있는 바위에 새겼다. 필운을 새긴 필운대(弼雲臺)는 지금도 서촌에 남아있다. 이 이름을 딴 동네가 필운동(弼雲洞)이고, 서촌의 필운대로(弼雲臺路)도 이 집의 바위글씨를 따랐다. 지리적으로는 필운대에서 경복궁으로 내려오는 길이 필운대로1길과 금천교시장이었으니 경복궁역 옆을 지나는 이 길이 오성의 출근길이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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