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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ae Shin Jan 16. 2024

서울쥐와 시골쥐

내 삶에 알맞은 곳은 어디인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동화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지역과 세대를 아울러서  다양한 소재와 재치로 우리에게 따뜻한 감성과 교훈을 줍니다. 하지만, 익숙한 결말과 구성으로 지루하기도 합니다. 이 메거진에서는 그 뻔한 이야기들을 건축가의 시선으로 새롭게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시골쥐와 서울쥐
town mouse and country mous 표지

이솝우화 중 하나인 ‘시골쥐와 도시쥐’ 이야기는 여러 시기와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각색되었다. 기본적으로는 도시의 풍요로움에 놀라다가, 고양이의 등장으로 시골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이솝은 기원전 6세기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야기는 아무리 좋아보이는 것이라도 이면에 부정적인 면이 있다는 교훈을 주려는 것이 자연스럽다. 도시는 먹을 것이 많아서 좋은데, 고양이가 있어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19세기를 거치면서 근대도시의 요소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변한다. ‘시골쥐와 도시쥐’를 우리말로 처음 번역한 이는 소파 방정환이다. 

시기는 1926년이었으니, ‘시골 쥐의 경성 구경’이었겠지만, 지금은 ‘시골 쥐의 서울 구경’이라는 제목의 그림책으로 볼 수 있다. 이솝우화에서 위험 요소가 고양이었다면, 방정환의 이야기에서는 위협의 대상이 도시의 교통수단이나 시스템, 사람들의 태도 등으로 각색된다. 찰리 체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1936년)가 보여준 산업화된 도시화의 모습과 겹치기도 한다.     

(좌) 시골쥐의 서울구경 , 2019 , 글 방정환 그림 김동성, 길벗어린이 / (우) 영화 모던타임스 포스터
도시화율 90%

전통사회에서 급격하게 도시화되던 시기에 도시에 대한 두려움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2020년 세계 도시 보고서에서는 인류의 도시화율이 55%를 넘었고, 특히 우리의 도시화율은 이미 90%가 넘었다. 대한민국에서 10명중 9명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화 속 이야기처럼 시골쥐를 동경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도시쥐로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현대 사회의 도시가 더 좋아진 것일까? 답은 모르겠지만, 아직도 시골쥐과 서울쥐 이야기가 읽혀지고, 전원의 삶을 꿈꾸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도시보다는 시골을 좋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왜 도시를 경계하고 두려워할까?     

주택보급율과 도시화율

우선 시골에서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가수 남진의 노래 가사처럼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평생 살고 싶은 사람은 전원의 삶을 이상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림 같은 집은 어떤 집일까? 작고 아담한집일까? 일정기간 생활해보면, 현대인에게 그림 같은 집이 정말 그림일 뿐이다. 도시계획에서 시골은 도시 외 지역을 의미한다. 비도시지역이다. 상대적으로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개별 건물에서 확보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일상에 필요한 많은 시설과 공간이 필요하다. 도시에서의 집보다 시골에서의 집이 기능도 많아야 하고, 규모도 커야한다.      

전원의 집

로마시대 Villa를 예로 들어보자. 농사에 필요한 공간과 기구, 수확한 작물을 가공하고 보관할 곳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집주인은 건물 일부를 일상 공간으로 사용하고, 대부분은 집주인의 생활을 지원하는 공간이다. 집이 유지되려면, 주변의 농지까지 포함해야 자존할 수 있다. 신분제도는 이러한 생활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에 있는 관가정이 좋은 예다. 관가정은 높은 절벽위에 위치한다. 관가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너른 평야는 이 지역의 경제력을 지탱해주는 안강평야다. 양동마을이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지만, 꾸준하게 인재들을 길러내고 중앙으로 진출시키면서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안강평야가 있다. 관가정이라는 이름은 농사 짓는 것을 바라보는 곳이라는 뜻이다. 노비나 소작농들이 농사짓는 것을 바라보는 집이다. 

(좌) 안강평야와 양동마을 / (우) 양동마을의 관가정

동서고금 모든 전원에서의 삶은 신분제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작고 그림 같이 아름다운 집은 주택이라기 보다 특별한 개인 휴양 시설이라고 봐야한다. farnsworth house도 falling water도 villa savoya도 일반 주택이 아니라 재력가들의 주말주택 또는 휴식처였다. 현대에도 도시의 인프라가 없는 곳에서 이상적인 삶을 꿈꾼다면, 스스로 모든 일을 해낼 능력이 있거나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전원주택은 주변의 나무를 초토화 시켜 댐을 만들고, 인공 호수의 중앙에 집을 짓는 비버의 집과 닮았다.     

도시의 집

도시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도 생각해보자. 마당 없는 집에서 답답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도시의 인프라의 효율을 높이려면 마당과 정원처럼 개인의 공간은 광장과 공원처럼 공공공간으로 통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인이동수단은 대중교통수단으로, 교육은 학교에서, 조리와 식사는 식당에서 이루어진다. 삶에 필요한 일들이 세분화 되고, 대중화되는 곳이 도시다. 현대 도시에서는 최소한의 개인공간과 개인물품을 담을 수 있는 최소한의 극단적인 주거공간도 생기고 있다. 주방, 식당, 거실은 집 밖의 도시에서 해결하고, 계절별로 달리 사용되는 물품 보관도 집밖에 두고 있다. 캐리어에 담을 수 있을 정도의 소지품과 유용한 기능의 기기만 있으면, 최소한의 도시적 삶이 가능하다.

비버의 집과 벌집

도시를 닭장 같다고 비유하지만, 도시적 삶은 벌이나 개미처럼 공동 운명체적 삶에 가깝다. 도시의 공공시설과 인프라를 함께 공유해야하는 시스템이다. 도시의 주거는 비버의 집보다는 벌집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연 속의 집 / 케나다 온타리오주의 토론토 인근 Markham 지역의 주거
선택은?

전원의 삶과 도시의 삶.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단정할 수는 없겠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에 맞는 곳에서 내 생활 방식에 적절한 집이 나에게 맞는 집이겠다. 도시에서 전원의 삶을 추구하거나, 전원에서 도시의 삶을 추구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가? 여러분의 의지와 성격이 여러분이 살아야 할 곳과 살 수 있는 공간을 알려줄 것이다. 극단적인 주거공간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 할 수 있는 균형 잡힌 다양한 주거공간을 기대해본다. 서울쥐이거나 시골쥐이거나 내가 만족하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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