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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Feb 10. 2019

1. 파일을 잘 만들어 주세요.

- 순전히 번역가로서의 조언

얼마 전, 늦은 밤에 낯선 분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안녕하세요' 한 마디뿐. 등록되어 있는 이름이 아니었기에 메신저 창을 나가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혹시나 받은 문자가 있는지 확인했지만 헛수고였다. 내가 답을 하기를 기다리시는 거 같아 - 그래도 여전히 먼저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게 맞다 싶다- 누구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다른 분에게 소개를 받고 번역 의뢰를 하기 위해 연락한 거였다.


말은 시원스러웠다. 프레젠테이션 파일인 데 총 글자 수를 알려주면서 곧바로 번역비를 물어왔다. 요율을 적용한 금액을 말씀드렸더니 글로도 놀랐다는 게 전해질 정도였다. 그래서, 요약을 좀 더 해서 글자 수를 줄이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답했더니 알겠다고 하고는 다시는 톡을 보내지 않았다.


이런 경험을 말하는 이유는, 번역용으로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받을 때마다 내용이 너무 많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파일은 번역 작업을 하면서도 답답하다. 아마도 비교군을 봤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터이다. 말할 것도 없이 비교군이란, 외국인이 영문으로 작성한 프레젠테이션 파일이다. 물론, 외국인들 중에서도 내용이 긴 사람도 있는데, 발표를 많이 해보지 않은 사람일수록 그런 성향이 드러난다.  


내용 다이어트를 하자.  


프레젠테이션 파일은 기업에서 파트너나 새 고객, 또는 윗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해 쓰이는데, 간단한 설명을 바탕으로 논의를 진행하게 된다. 물론, 임원인 경우 내용이 많은 걸 선호하기도 한다. 다른 경우에는 국제회의나 행사에서 많은 청중을 위한 가시성을 위해서 사용된다. 어떤 경우든 자료는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좋다. 그 말은, 발표자가 준비를 아주 철저히 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발표에 익숙하지 않을수록 불안감 때문에 파일에 모든 걸 '때려 넣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보통 국제회의나 행사에서 발표할 때 연사당 주어진 시간은 20분 정도이다. 물론, 더 긴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는 20분으로 국한시켜보겠다. 그러면 파일은 15-20장이면 충분하다. 30장까지 가기도 하는데, 그래도 장당 들어가는 내용은 최대 6-8줄이면 된다. 그리고, 글보다 데이터가 더 많은 내용을 알려준다. 이렇게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한국인이 주는 파일은 20분의 발표를 위해 30장은 기본이고 60장을 넘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20분 발표에 80장이라니


재밌는 이야기 한 토막. 한 보안 관련 행사에서 동시통역을 할 때였다. 동시통역은 두 명의 통역사가 파트너가 되어 번갈아서 통역을 한다. 보통 통역사는 한 번에 20분-30분 정도 최고로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연사별로 맡기로 했다. 행사에 유일하게 자료가 없는 연사가 있었는데, 발표 직전 통역 부스 틈으로 들어온 파일을 보고 파트너와 나는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20분 발표인데 80장이었다. 게다가, 30장 정도는 단체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다음부터는 계속 CCTV 화면의 화질을 비교한 사진만 늘어놓은 게 다였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다 커버하지 못했다. 연사가 한 사건을 놓고 어떻게 해결했는지 설명하면서 삼천포로 빠졌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깔깔대고 들었을텐데 잘못된 만남이었다. 웃긴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분의 사투리 톤도 웃겼지만 사투리를 이해하지 못해 모르는 단어들도 생겼다. 또, 어찌나 빨리 말하는지 통역으로 쫓아가기에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사회자가 시간을 지켜달라며 몇 번을 방해했지만, 연사의 집중력은 그날따라 너무 좋아 사회자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 연사의 말을 통역하던 파트너는 웃음을 참지 못해 중간중간 마이크를 꺼야 할 정도였다. 그 정도면 대신 해줘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도 이미 아예 책상 밑으로 들어가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이 웃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발표는 웃음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이미 시간은 50분을 넘겼다. 한 사람 때문에 행사가 50분이나 늦게 끝난 것이다.


이쯤에서 오랜 시간 통역/번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자료를 보며 나름 습득한 노하우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뭐, 대부분 아는 내용이겠지만, 한 번 더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다. 물론, 자료 작성 언어는 한국어 기준이다.  


발표 연습을 해야 한다.


첫째,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줄을 넘어가는 긴 문장이 아닌, 몇 개의 단어를 사용하는 게 좋다. 그 요약을 뒷받침하기 위한 그래프나 통계자료는 가능하면 최근 것이어야 하며, 출처를 꼭 밝힌다. 외국인들은 특히 자료 출처를 상당히 궁금해하는데,  그 자료에 대해서 질의 시간에 꼭 질문을 한다. 연사가 대답을 잘 못하는 걸 볼 때면 나까지 안타깝다.


둘째, 기억에 남을만한 사진이나 데이터만으로도 가시성이 충분히 확보되니, 같은 내용을 글로 또 적지 않는 게 좋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억을 떠올려 설명할 수 있다. 번역을 하다 보면 장만 다르게 해서 중첩되는 내용이 정말 많아, 하면서도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발표한다. 백업 자료는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좋다. 간단히 설명을 한 후, 질의 시간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잘 준비되어 있는지 드러낼 수 있으니 자료 자체에 너무 중압감을 갖지 않으면 좋겠다.


가끔 아주 운이 좋을 때면 한국분이 작성한 군더더기 없는 내용의 파일을 받을 때가 있다. 통역과 마찬가지로 번역을 할 때도 그 주제에 대한 용어를 공부해야 하는데, 이런 파일을 만나면 공부할 때도 매우 재미있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또, 이런 분은 발표도 주어진 시간에 딱 맞게 중요한 내용만 아주 잘 설명한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발표는 그냥 앉아있다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용을 숙지하고 삼천포로 빠지지 않기 위해 집중해서 연습해야 한다. 나 같은 경우에도 다른 일로 발표해야 할 때가 있으면 시간을 재면서 연습한다. 중요한 발표는 녹음을 해서 안 좋은 습관은 없는지까지 확인한다. 이렇게 최소 세 번은 하고 반드시 말해야 할 내용은 자료에 메모까지 해둔다. 충분한 준비가 되면 단어 몇 개만 봐도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 파일의 내용은 더 간단해질 수 있다.


자신이 작성한 프레젠테이션 파일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순수하게 번역하는 입장에서만 봐도 그렇다. 회사에 고용된 상근 통역/번역가들은 내용 없는 자료-우리끼리는 양만 많고 핵심이 없는 자료를 그렇게 부른다-를 받으면 속으로 욕하면서 번역을 한다. 그러니, 파일을 작성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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