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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Feb 25. 2019

24. 돌아와야 하는 여행

여행이라는 건 돌아올 곳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 있다. 어렸을 때 나에게 여행이란 그곳에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거였다. 떠날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다가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스트레스가 쌓이는 게 여행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낯선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고, 돌아다니다 다시 밥을 먹고 침대에 눕는 일을 며칠간 반복하면서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감사한 기회로 바뀌었다.


왜 어른들이 다리 힘 있을 때 무조건 여행을 가라고 한 줄 알겠다. 30대만 해도 괜찮았는데 40대가 되니 시차 적응이 두 배는 더 걸리는 것 같다. 4년 전 갔던 여행에서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두통이 심해 승무원에게 두통약을 부탁할 정도였으니. 그 후로 이 말이 더 와 닿았고, 여건이 되면 가려고 노력한다. 2년마다 여행을 가기 위해 적금도 가입해 놓는다.


여행은 많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엄마가 병원에 오래 입원해서 언니와 사이가 틀어질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엄마를 보러 오지 않는 언니의 이기심을 이해할 수 없었고, 자식으로서의 도리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그것을 핑계로 언니를 속으로 미워했다. 그러니 내 마음은 지옥일 수밖에. 그때 친한 친구를 붙잡고 얼마나 답답함을 토로했는지 지금도 기억난다. 결혼한 친구는 언니를 이해하라는 말도 했고, 나처럼 미혼인 친구는 같이 속상해줬다.


여행을 갈 때 책을 가져가는 버릇이 있다. 읽던 안 읽던 상관없다. 그냥 나에게는 의식과도 같다. 언니와의 일이 있은 후 런던으로 가는 여행을 위해 마음 내려놓기 책을 세 권이나 샀다. 비행기 안에서 한 권을 읽었고, 여행 중에 잠자리에 들기 두 권을 꾸준히 읽었다. 미워하는 마음이 희미해지기 시작한 건 세 권째를 읽었을 때였다.


세 권 모두 작가도, 국적도 달랐다.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같았다. 내 마음과 똑같을 거라고 기대하지 말 것. 심지어 형제라도, 배우자라도 그런 기대 따위는 하지 말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니, 그 사람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무조건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라고도 했다.


아주 단순한, 어찌 보면 추상적으로까지도 들린다. 하지만, 이상하게 조금씩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내가 모든 걸 알 수 없는 거니까. 돌아와 언니를 만났을 때 미움은커녕 안쓰러운 마음만 들었다. 그리고, 나쁜 말을 내뱉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한국에서 같은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을 거 같다. 짓이기는 현실이 계속 누르고 있는 상태에서 가슴과 시야는 넓어지지 못한다.


그때부터 인 거 같다. 돌아온다는 것에 대한 약간의 기쁨이 생기게 된 게. 일상으로 돌아와 버틸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고나 할까. 그리고 마지막 2년 전 코펜하겐과 스톡홀름 여행은 모든 게 다 좋았다. 이번에도 책을 가져갔지만 다 읽지 못하고 돌아왔다. 괴로움이 없어져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간 북유럽 여행은 모든 게 환상적이었다. 길을 잃어도 좋았고, 매일 밤 여행을 블로그로 담느라 두 시간이 걸려도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 자유롭게 밥을 먹고, 미친 듯이 걸어 다니고,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서 구경하다가 벌써 어두워진 오후 네 시에 맥주 한 잔 정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여전히 그곳에 눌러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잠시뿐. '돌아가야지'라는 말이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 돌아갈 곳이 있으니 우주 시간으로는 찰나와 같은 여행이 더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래서 여행이 점점 더 좋아진다.


다음 여행지는 이웃 블로거님의 글을 볼 때마다 달라진다. 하지만, 친구가 살고 있는 하와이로 마음을 굳히기로 했다. 그녀가 심드렁하게 보내는 하와이 절벽 해변과 고요한 바다를 직접 눈으로 담고 싶으니까. 당신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입니까?


덧글) 사진은 코펜하겐의 한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회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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