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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Mar 20. 2019

27. 눈이 부시게 김치찌개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드디어 종영했다. 총 12회의 이야기인데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더 흥미로웠던 드라마였다. 타임 리프인 줄 알았는데, 현재이고, 그런 줄 알고 봤는데, 뒤죽박죽이 된 기억을 가질 수밖에 없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김혜자의 이야기. 말도 안 된다면서도 뭐, 노인들의 이야기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보고 있었다. 모험이 성공적으로 끝난 바닷가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 그 행복한 시간에 혜자의 정신이 돌아오면서 '나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라는 내레이션은 정말 충격적인 엔딩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대본을 잘 쓸 수가 있는지, 아마도 요양병원에 5년을 들락날락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서 그런가 보다. 작가도 나와 같은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라에몽 할머니가 죽은 딸의 환영을 보며 엄마 해봤으니 다음 생에도 자기 딸로 태어나면 더 잘해줄 수 있다는 장면. 내내 말없는 아내에게 밥을 떠먹여 주고 산책시켜줬던 살이 쪽 빠진 할아버지가 드디어 부지불식간에 사망한 아내가 머리 끝까지 시트를 덮고 이동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던. 그러고 나서 병실로 돌아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내가 누워있었던 텅 빈자리를 보며 숨죽여 우는 모습에 우리 아빠는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걸 보니 아주 요망한 드라마다.


나에게 있어서 '눈이 부시게'의 명장면은 '김치찌개를 먹는 장면'이었다.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중학생 아들 대상이와, 남편을 고문으로 잃고 생업에 뛰어들어 하루 벌어 하루 살아야 하는 젊은 혜자의 아침 밥상 장면. 가장 먼저 화면에 들어온 장면은 퉁퉁 불어터진 '어묵'이 들어간 김치찌개였다. 나에게는 아주 익숙한 음식, 바로 우리 엄마가 김장김치를 다 먹을 무렵 시어 빠진 김치에 기름을 넣고 달달 볶다가 물을 많이 부은 후, 삼각형으로 썰은 어묵을 많이 넣은, 그 어묵 김치찌개이다.


어묵이 퉁퉁 불어 있으니 김치찌개 양은 당연히 많아 보인다. 아마도 가난한 시절, 엄마는 얼마 안 되는 음식으로 자식들이 더 많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김치찌개에는 원래 어묵이 들어간다고 생각했고, 매운 걸 못 먹었기에 싱겁지만 어묵 맛이 베어든 국물이 좋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만나게 된 김치찌개에는 대부분 돼지고기가 들어가 있었다. 당연히 거부감에 입에 대지 않았다. 둥둥 뜬 돼지기름도 싫었거니와 물에 빠진 고기의 설겅거리는 느낌은 먹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기 냄새가 김치찌개를 가려서 별로였다. 나에게는 여전히 '삼각형으로 썰은 어묵'이 들어간 김치찌개가 최고였다.

 


그러던 작년 형제들 모임에서 새언니가 이런 얘기를 꺼냈다.


"나 시집오고 맨 처음에 어머니 김치찌개 보고 깜짝 놀랐어요. 원래 찌개는 자박자박해야 되는데 국물이 너무 많은 거야. 그리고 돼지고기도 아니고, 어묵. 난 그런 김치찌개 처음 봤어요."


그러면서 오빠와 새언니는 설명했다. 가난해서 그런 거라고. 더 많아 보이게 하려고 어머님이 그랬을 거라고...  


비로소 나는 밖에서 먹었던 김치찌개를 떠올렸다. 김치가 조금 잠길만큼의 국물이 있어서 매우 걸쭉하다. 왜 그 생각을 못했던 걸까. 돼지고기 기름이 들어가야 음식이 더 맛있다는 건 아직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지금 나는 대중식당에서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아무 불편 없이 잘 먹고 있다. 돼지고기가 많이 들었네, 안 들었네 불평까지 하면서. 하지만, 집에서 해 먹을 때에는 자동으로 어묵을 넣고, 국물을 많이 붓는다. 안 그래도 되는데 내 몸 안에 인이 박혀있어서 그런가 보다.


드라마에서 대상이는 엄마가 끓인 어묵 김치찌개를 불평한다. 나는 불평은커녕 너무도 맛있게 먹었다. 지금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어묵 김치찌개'를 택할 것이다. 나의 추억의 음식이며, 엄마를 떠올릴 수 있고, 아픈 기운이 들 때 먹으면 정신이 돌아오는 음식. 드라마보다 엄마 보고 싶기는 처음이네.


엄마가 요양병원에 계실 때 가끔 입원해있던 환자가 사망하면 간호사들끼리 하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교대근무를 하는 그들은 다음날 출근해서 환자의 사망 소식을 듣는 게 허다할 텐데도 항상 안타까운 표정이다. 그런데, '사망'이라는 말 대신 영어단어를 이용하고 있었다.


"XXX 환자 expire 했대."


Expire: 1. 만료되다, 만기가 되다 2. 끝나다 3. 이승을 하직하다 (네이버 사전)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expire는 계약서가 만료되고, 보험계약이 만기 되며, 제품 유통기한이었다. 3번의 뜻이 있는 줄 정말 몰랐다. 그때에는 사람을 상품 취급하는구나 싶어 조금 씁쓸하면서도 원래의 뜻을 살펴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는 언제 expire 될까 하고 힘들어하기보다는, 김혜자 님의 마지막 내레이션처럼 오늘을 즐기며 살아야 하는데, 이 생각은 언제 expire 되려나. 이번에는 좀 더 길었으면 하네.  


사진 출처: http://tv.jtbc.joins.com/dazz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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