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에 결혼하고 2003년 3월에 언어치료 석사과정으로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결혼 전에 언어치료사로 일을 하던 중 부족한 부분이 많이 느껴져서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지금은 대학에 언어치료 전공의 학부가 많이 생겼고 국가고시를 치고 합격을 해야 언어치료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학부가 많이 없어서 언어치료사가 되려면 학회에서 개최하는 연수를 일정 시간 듣고 시험을 쳐서 민간자격증을 취득했었습니다. 그렇게 언어치료사 되고 현장에서 일하다 보니 전문성에 대한 부족한 부분을 느꼈고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 선택한 대학원이었습니다.
배움의 시간은 즐거웠습니다.
부산에서 대구까지 기차로 통학을 하면 일주일에 하루는 대학원으로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3학기가 되었고 논문 프로포잘을 준비하던 시절 임신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날짜를 세어보니 임신 기간에 논문을 준비하면 출산 전에 완성하고 졸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던 시절이라 무리하지 않기 위해 출산 휴가를 일찍 신청하고 3학기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정기검진을 위해 산부인과에 갔다가 배 속의 아기가 쌍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너무 감사했습니다. 임신 중 무사히 프로포잘을 마무리하고 여름방학을 보내던 중 어느 날 밤에 배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던 남편을 깨워 산부인과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응급실에서 간호사가 뱃속 아기들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던 도플러 검사를 하던 중 머리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네요. 한 아기 심장 소리가 잘 안 들리네요. 쌍둥이라서 소리가 섞여서 그런가? 내일 아침에 담당 선생님께 가서 초음파 검사를 하면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아침이 되었고 담당 선생님이 응급실로 내려오셔서 초음파 검사를 하셨습니다. 평소보다 꽤 긴 시간 화면을 보시고 각 각의 아기 머리 모양을 갭춰하셨습니다.
“산모님, 여기 한 명은 머리 모양이 이쁘게 동그랗지요? 그런데 옆에 있는 사진은 머리 모양이 좀 이상하지요? 심장 소리도 확인이 안 되네요. 아기 한 명이 뱃속에서 잘못된 것 같습니다.”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남편과 저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때가 7개월에 접어들 무렵이었습니다. 쌍둥이였지만 뱃속에서 큰 탈이 없이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을 매달 확인했었는데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뱃속에서 잘못된 아기 때문에 아직 살아있는 아기가 혹시나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뇌성마비가 될 수도 있고 발달장애가 될 수도 있고 지적장애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제 머릿속에는 제가 언어치료 했던 뇌성마비, 발달장애, 지적장애 아이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2004년 9월 7일. 이날은 첫째 딸이 34주 6일 만에 2.08kg의 무게로 태어난 날입니다. 7월의 그 날로부터 9월 7일까지 제가 보낸 시간들은 지금도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저 간절히 기도하고 바라며 버티고 버텨야만 했던 날들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가 믿고 있는 절대자에게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의사 선생님은 뱃속에서 먼저 가버린 아이가 남아 있는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먼저 가버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좋은 것을 남아 있는 아이에게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쌍둥이 외할아버지가 된다는 기대로 가득했던 친정 아빠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가게에서 매일 성경을 필사하였습니다. 딸의 순산을 바라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자 한 자에 간절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2kg의 작고 작은 아기는 인큐베이터에서 14일을 보낸 후 드디어 엄마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남편은 출장이 많아 나 홀로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100일 정도를 친정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으로 돌아온 날 저는 조용히 상자 하나를 채우고 테이프로 봉했습니다. 그 상자에는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책과 준비하던 논문자료들을 담았습니다. 그 상자를 싸던 날 다시 그 상자를 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나 작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이전에 내가 해오던 일들을 더이상 미련을 갖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대학원에 대한 꿈을 고이 접어 그 상자 속에 함께 담았습니다. 다시는 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휴학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결국 몇 년 후 재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의 퇴직 직전에 논문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석사과정에 입학한 지 8년 반만에 드디어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