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설렁탕의 주요 재료는 소의 뼈다. 쇠고기는 궁궐, 관청, 향교에서 소비한다. 지방에도 관청은 있다. 관청이 있으면 향교가 있다. 지방 향교에서도 제사를 모시고, 유학자들이 공부한다. 지방 관청에서도 소를 도축한다. 관청, 향교에서는 꾸준히 쇠고기를 소비한다. 부산물로 끓이는 설렁탕이 지방에 있었던 이유다. 정식 음식이 아니니, 이름이 없었다. 큰 시장이 서질 않으니 가게에서 팔지 않았을 뿐이다. 상업이 발전하면서, 조선 말기에는 지방에도 시장이 선다. 시장에서는 음식을 팔고, 아마, 설렁탕 비슷한 음식을 내놓았을 것이다.
조선 시대 음식은 역원(驛院)과 주막(酒幕)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역원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주막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다. 음식점, 식당은 조선 말기에 나타난다. 정식 이름도 없이, 가정집 한 귀퉁이에서 음식을 파는 곳들이다. 역원도 아니고 주막도 아니다. 지방 길목이 아니라, 한양 등 대도시에 생겼다. 제법 큰 도시의 밥집들이 점점 발전하여 식당이 된다. 조선 말기에는 한양과 지방 대도시에 이런 집들이 등장한다.
조선은 역원제(驛院制)의 나라다. ‘원’에서는 말도 쉬고 사람도 쉬었다. 하룻밤 묵어가기도 했다. 식사도 했다. 음식이 필요하다. 원을 관리하는 별도의 관리들이 있었다. 역과 원을 따라서 주막도 생긴다. 민간이 세운 주막은 임시 건물이다. 주막의 ‘막(幕)’은 비바람을 피하려고 임시로 지은 시설이다. 정식 건물이 아니니 비, 바람, 햇볕을 피하는 정도였다. 발전한다. 어느 순간부터 음식을 먹고 잠을 잔다. 주막은 민간의 역원 노릇을 했다. 술과 음식을 내놓는 간이식당 노릇도 한다.
서울의 종로통이나 마포 일대는 유난히 이름난, 오래된 설렁탕집이 많다. 설렁탕과 더불어 대중적인 음식을 내놓는 가게들이 시작이다.
종로, 청계천, 무교동, 명동, 을지로 일대는 한양 도성의 사대문(四大門) 안이다. 동, 서, 남대문의 안쪽이다. 그중 종로는 육의전과도 가깝다. 큰길을 따라 육의전이 있었고, 피맛골이나 피맛골 안쪽은 크고 작은 가정집이 있고 작은 길이 있었다.
남양주, 양평 일대의 땔감이나 산나물, 왕십리 일대의 들나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한양은 소비도시다. 한양 도성 안에서 채소나 땔감을 생산하지 않는다. 외부에서 들여와야 한다. 한양 도성 밖의 여러 생산물이 소비지인 한양으로 모여든다. 시장이 선다. 종로통 일대를 중심으로 시장이 선다. 벼슬아치, 부호들이 많이 사는 삼청동, 가회동과 가깝다. 경복궁을 비롯하여 여러 궁궐과도 가깝다. 시장이 서고, 사람이 모인다.
시장에는 가난한 일꾼들이나 손님들, 상인들이 밥 먹을 곳이 필요하다. 개장국, 장국밥, 설렁탕, 추어탕 등을 내놓은 가게들이 생긴다. 지금도 오래된 설렁탕 노포들이 종로통에 많은 이유다.
유명한 서울 청진동의 해장국도 마찬가지다. 이른 새벽부터 고된 일을 하는 이들이 지난 밤의 숙취를 풀 일은 없다. 이른 아침, 밥 한 그릇, 술 한잔으로 속을 채워야 한다. 해장국이 아니라 술국이다. 막걸리 한 잔에 선지 넣은 술국을 욱여넣는다.
모든 국가는 상업 행위에 세금을 걷는다. 독점적인 시전(市廛) 체제는 1791년(정조 15년)의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무너졌다.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는 가게 이름이 필요하다. 이름 없는 허름한 가게들이 간판을 단다. 우리가 생각하는 음식점이 된 것이다. 19세기 후반, 조선 말기부터 서서히 ‘음식점’이 생기기 시작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음식점은 20세기 초반에 간판을 단 피맛골 부근의 설렁탕집이다. 그중 한 가게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숱하게 많은 설렁탕집, 장국밥집, 술국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가게도 마찬가지. 처음 문을 열고 간판을 단 가게 중의 하나였다.
1922년 12월 21일 동아일보 칼럼이다. 제목은 “조선 사람은 어찌하면 살꼬?”이다. 외국산 수입품 쓰지 말자는 주장이다. 외국제품을 쓰는 순간 우리 돈이 모두 외국으로 흘러가고, 우리는 가난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야기 중에 우리의 음식으로 설렁탕이 나온다.
(전략) 이렇게 여러분은 사랑하는 불쌍한 동포들의 양식을 빼앗어다가 쓸데없이 남의 손에 던져주지요. 여러분이 무서운 죄인이 아닙니까? 망할 도를 닦은 이가 아닙니까?/호떡인들 왜 사 먹으며, 사탕과 과잔들 왜 사 먹어요? 먹고 싶거든 만들어 먹으시오. 만들 줄 모르거든 만들 줄 알 때까지 참고 그때까지는 팥죽이나 떡이나 설렁탕으로 견디시오./호떡 가가(家家)와 과자 집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팥죽가가와 설렁탕집이 하나씩 줄어갑니다. (후략)
호떡과 과자, 사탕은 모두 외국에서 수입한 것들이다. 호떡은 중국인들이 만든다. 사탕과 과자도 외국에서 건너온 것들이다. 먹고 싶으면 만들어 먹으면 된다. 못 만들면?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 그동안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음식으로 버티면 된다. 팥죽, 설렁탕, 떡 등은 우리도 쉽게 만들 수 있는 우리나라 음식이다. 호떡이나 과자를 파는 가게가 하나씩 생길 때마다 팥죽 파는 집, 설렁탕 파는 집은 하나씩 없어진다. 이름 없이 전국적으로 먹었던 설렁탕이 1922년 무렵에는 대표적인 우리 음식이 되었다.
설렁탕은 서민의 음식이었다. 번듯한 큰 길가가 아니라 좁은 뒷골목 안에 허름한 가게에서 팔았던 음식이다. 종로 1, 2가의 골목 안에 노포 설렁탕, 해장국집이 많은 이유다.
마포는 종로통과 다르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사대문 안을 이른다. 동서남북에는 큰 문을 만들고 큰 문 옆에 작은 문[小門, 소문]을 세웠다. 한양은 도성 안이다. 도성 밖은 성저오리(城底五里), 성저십리(城底十里) 등으로 나누었다. 한양 성벽을 중심으로 가까운 곳은 오리, 조금 먼 곳은 십리다.
마포 일대는 성저십리의 지역이다. 더하여 마포는 한양 도성으로 갖가지 농, 수산물이 들어오는 항구였다. 지금도 신해통공을 기념하는 팻말은 마포대교 가까운 곳에 있다. 마포가 난전(亂廛)의 핵심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마포는 사전(私廛)의 중심지였다.
삼남 중 호남과 충청의 곡물들은 상당수 마포나루로 들어왔다. 서해안을 따라 혹은 내륙의 강을 따라 많은 곡물이 한양으로 들어왔다. 세금으로 거둔 곡물들이었지만, 사상(私商)들이 관리하는 곡물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했다. 국가의 세금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거래하는 곡물들도 늘어났다. 한양으로 들어오는 곡식들은 송파나루와 마포나루에 모였다. 한강을 중심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이들은 경강상인(京江商人)이다. 경강상인은 한강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그중에서도 마포나루는 중심지였다. 이들은 마포, 서강, 용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난전을 운영하던 상인, 사상이었다.
마포나루에는 서해안의 해산물을 들여오는 창구였다, 마포포구, 마포나루에는 많은 장사치와 소비자들이 모여들었다. 곡물과 해산물이 거래되었다. 사람이 모여들면 자연스럽게 시장이 선다. 마포는 공식적인 시전(市廛) 상인들이 아닌 난전(亂廛) 상인들의 중심지였다. 시장을 중심으로 서민적인 음식점들이 들어선다. 지금도 마포 일대에 오래된 설렁탕집들이 많은 이유다.
“밤 깊은 마포 종점”은 전철의 종점이었다. 조선 시대 마포나루, 마포포구였던 곳이 난전의 중심지가 되고, 일제 강점기에는 전철의 종점이 된다. 마포대교는 1960년대에 세웠다. 그 이전에는 마포가 전철, 버스 등의 종점이었다. 호남, 충청의 농산물들이 도착하는 포구, 서해안의 생선 등 해산물을 들여오는 곳, 난전이 서고 사람들이 웅성대던 곳이었다. ‘마포 종점’은 곡물이 거래되고, 마포 ‘새우젓 장사’가 각종 젓갈을 사고팔던 곳이었다. 서민의 음식인 설렁탕집이 많았던 이유다. 지금의 마포 일대 ‘먹자골목’과 설렁탕집 등은 뿌리가 깊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도 설렁탕은 등장한다. 인력거꾼인 남편은 어느 운수 좋은 날, 제법 많은 돈을 번다. 병석의 아내는 뜨끈한 설렁탕 국물을 먹고 싶어 한다. 제법 많은 돈을 번 날, 남편은 설렁탕을 사서 집에 가지만 이미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설렁탕은 돈을 치르고 사야 하는 음식이지만, 인력거꾼도 살 수 있을 정도의 서민적인 음식이었다.
종로 ‘우미관’ 일대를 주름잡던 협객 김두한의 이야기에도 설렁탕은 등장한다. 서민적인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1930년 11월 12일의 기사에는 음식 가격 조정에 관한 내용이 있다. 조합의 자율적인(?) 결정으로, 냉면, 장국밥, 떡국, 대구탕반 등 7가지 음식의 가격은 원래 20전에서 15전으로 내린다. 문제는 설렁탕값이다. 기사에는 “설렁탕은 13전으로 내리기로 결정했으나, 관할 종로서에서 10전으로 내릴 것을 종용하고 있으며 아마 10전으로 내릴 것”이란 내용이 있다. 설렁탕은 다른 음식보다 싸다. 같은 길거리 음식인데 장국밥이나 대구탕반보다 싸다. 서민적인 음식이다.
가격이 싸고 영양가는 풍부하니 설렁탕은 ‘길거리 서민 음식’으로 자리매김한다. 1930년대 설렁탕은 주요한 ‘배달 음식’이 된다. 1929년의 소설에 “설렁탕 그릇의 탑을 둘러멘 ‘뽀이’의 자전차가 사람들 사이의 물결을 바느질한다”는 표현도 등장한다. 별도의 배달꾼을 둘 정도로 설렁탕은 서민적이며 대중적인 음식이었다. 그 중심에 서울 종로통과 마포가 있었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